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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타박타박 세계일주 2 :: 버리고 싶었던 욕심과 불안이 모두 배낭 속에

한성은 2016. 5. 17. 12:24

'배낭 무게는 나의 업보(業報)’

 

배낭여행자들이 자주 쓰는 문장이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참인 명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업보라는 거창한 낱말을 쓰지 않더라도, 결국 배낭 속 모든 물건은 나의 욕심과 같은 무게다. '이건 꼭 있어야 해. 이건 가져 가야 해. 이건 없으면 불편할 거야.’ 그러는 사이에 배낭은 자꾸만 무거워져 간다. 배낭을 싸고 어깨에 둘러매고 혀를 내두르고 다시 풀고 더 줄일 수 없을까 고민하기를 서너 번 하는 동안 '이 많은 짐은 대체 다 무엇인가’하는 근원적인 질문이 생겼다. 이게 다 그동안 끌어안고 살았던 나의 불안들이었다는 것을 무릎을 치며 깨닫는다. 하지만 더는 줄일 수는 없다. 욕심을 내려놓고 불안을 떨칠 수 있었다면 나는 이렇게 대책 없이 떠나려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그냥 짊어지기로 한다. 75L 가방에 가득 찬 욕심과 20L 가방에 가득 찬 불안을 합쳐 20kg이라는 저울 무게를 확인하고 한숨을 쉬며 사진도 찍어둔다.

 

 

 

배낭여행 세계일주 준비물 정리

 

이번 여행이 처음은 아니다. 10년 전에도 혼자서 배낭을 메고 인도와 네팔을 걸었던 적이 있다. 당시 인도와 네팔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여행 고수에 속하는 장기 여행자들은 오히려 짐이 적었고, 겨우 한두 달, 길어봐야 서너 달 다니는 나 같은 여행객들은 지나온 인생 모두를 가방에 넣고 다녔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때보다는 더 가볍게 떠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결과는 의도와 정반대가 되었다. 장기 여행을 준비하고 있거나 그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초보 장기여행자의 배낭 속을 아니 욕심과 불안을 낯부끄럽지만 펼쳐본다.  

여행 준비를 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짐을 꾸리는지 열심히 찾아보았다. 사실 배낭 하나 메고 오래도록 여행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란 사람마다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모든 여행자들이 똑같은 배낭을 메고 똑같은 짐을 꾸리고 떠나지는 않는다. 여행객들의 배낭 속을 보며 자신만의 색깔이 듬뿍 담긴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참 쏠쏠했다. 나 역시 다른 여행자들과 큰 차이는 없겠지만, 보편적인 물건들은 제외하고 특별하다 싶은 것들만 정리를 해봤다.

 

 

영문졸업증명서

친한 형이 현재 베트남에서 한국어 교사로 일하고 있다. 이번 여행의 큰 목표 중 하나가 영어를 제대로 배워서 ‘한국어 교원자격증’을 따는 것이다. 현재 국어와 역사 교사 자격증이 있지만, 개별언어로서의 한국어를 깊이 배우고 싶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기회가 된다면 교육 관련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챙긴 부적 같은 것이다.

 

셔츠, 재킷

몰타와 호주에서 영어 연수를 하고, 과테말라에서 스페인어 연수를 할 예정이다. 외국 친구들을 만나고 좋은 자리에 함께 갈 기회가 생길 수도 있겠다 싶어서 배낭여행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굳이 챙겼다. 그리고 호주에서는 가능하다면 시간제 일자리라도 해보고 싶어 면접을 준비할 필요도 있었다. 장기 여행을 다녀온 주변 사람들의 조언까지 더해져 당당히 리스트에 오른 물품이다.

 

노트북, 태블릿, 전자책 뷰어

나는 전자기기, 인터넷 그리고 책을 좋아한다. 물론 좋아하는 것과 잘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나는 IT 전문가도 아니고, 독서왕도 아니다. 노트북은 은행이나 관공서 업무를 위해서 필요했다. 익스플로러 환경에서만 가능한 일들이 여전히 많다. 그리고 여행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했던 약속이 ‘글을 쓰자’는 것이었다.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기 위해서 노트북은 꼭 챙겨야 했다. 태블릿PC는 여행 중간중간 이어질 어학연수를 하는 데 효과적이라 판단했다. Grammer in use, libro del alumno같은 영어와 스페인어 교재를 스캔하여 PDF로 만든 후 태블릿PC에 담았다. 그 외에 참고서적 등을 20여 권 자르고 스캔하여 같이 담았다. 공책을 많이 가지고 다니기 어려우니 태블릿을 이용하여 필기도 같이하면 효율적일 것 같다. 그리고 전자책 뷰어는 긴 이동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기 위해 잃어버려도 아쉽지 않은 것으로 챙겼다.

 

침낭

고민을 참 많이 했던 물품이다. 체류비용 문제로 대부분 여름을 따라 이동하는 경로를 택하여 여행을 하겠지만, 노르웨이 북쪽 끝 북극권까지 올라가기도 하고, 한겨울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래킹과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의 새벽 날씨를 생각하면 1년 동안 무겁게 짊어지고 다니더라도 가능하면 크고 가벼우면서 성능이 좋은 침낭이 필요했다. 예산과 기능의 절충이 정말 어려웠다. 애초에 ‘예산'과 ‘성능'이라는 두 종속 변수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은 것이라 결코 동시에 만족할 수 없다.

 

붓펜, 딥펜, 워터브러쉬

캘리그라피(손글씨)가 취미이다. 짐은 점점 많아지는데 이 많은 펜과 잉크, 팔레트를 챙겨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지난번 인도여행에서 가장 마음 깊이 남았던 장면이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노트에 그리고 있던 한국 여학생이었다. 타지마할 앞에서 내가 카메라를 꺼내 들고 찍은 사진은 시내에서 파는 엽서 속 타지마할과 전혀 다르지 않았지만, 그 친구가 그리는 타지마할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자신만의 타지마할이었다. 그 친구 같은 그림 솜씨는 없지만, 나도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다. 이 또한 나의 욕심이다. 그리고 그 욕심은 또 한 번 배낭 속에 차곡차곡 더해졌다. 

 

 

얀테의 법칙

 

이제 내일이면 출국이다. 가족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 작별을 하고 뭔가 빠진 것은 없나 고민을 한다. 사직서를 내고 퇴직을 한 후 두 달 동안 나는 어떤 일들을 했었나. 실업급여 신청을 하고, 국민연금을 정지했다. 아파트 전세금 대출 연장을 미리 해두고, 출국 후에는 국민건강보험을 정지해야 한다. 자동이체 계약들을 정리하고, 인터넷을 정지하고, 카드값을 정리하고, 2년 후에는 사용하지 못할 물건들을 중고 장터에 내다 팔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오래된 자동차와 아끼던 자전거는 동생에게 주고, 손때 묻은 커피 그라인더는 부모님께 드렸다.

 

그러고 보면 여행을 간다는 것은 잠깐 멈추는 것 같다. 연금을 정지하고 인터넷을 정지하고 휴대폰을 정지하고 결승선이 없는 달리기 경주 같던 내 인생도 잠깐 정지했다. 기계도 멈추지 않고 가동하면 과열로 인해 고장이 나고, 컴퓨터도 장시간 켜 두면 OS의 성능저하가 따른다. 나도 잠깐 멈추고 천천히 걷는 것이리라. 그리고 문득 덴마크에서 유명한 ‘얀테의 법칙’을 떠올린다. 여행 준비 노트를 뒤적거리다가 꾹꾹 눌러 써 놓은 얀테의 법칙을 찾는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대책 없이 세계 일주를 떠나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하고 잘난 일이라고 기사를 쓰고 송고하고 심지어 원고료를 받았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여전히 트랙 위를 달리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여행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다 똑같이 위대하다.

 

 

<얀테의 법칙>
1.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2. 다른 이보다 선량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3. 다른 이보다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4. 자신이 뛰어날 것이라 자만하지 마라.
5. 다른 이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6.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지 마라.
7. 자신이 무언가에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마라.
8. 다른 이를 비웃지 마라.
9. 다른 이의 상냥함을 기대하지 마라.
10. 다른 이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마지막 욕심

 

어제는 석가탄신일이었다. 남들 앞에서는 더 배우고 성장해서 돌아오겠다고 외쳐 놓고, 뒤에서는 배낭 가득히 나의 불안과 욕심을 꾸역꾸역 넣으며 짐을 꾸리는 나를 부처님이 웃으면서 내려다보신다. 사실은 그때야 내 배낭 속 짐들이 모두 내 불안이고 욕심이라는 것을 겨우 깨달았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배낭에서 꺼내어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게 나라는 사람이 가진 그릇이었다. 효도 삼아 어머니를 따라갔던 절에서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며 욕심 하나를 슬그머니 더 꺼내어 놓는다.

 

 

"부처님 제가 욕심을 가득 짊어지고 여행을 떠납니다. 돌아올 때는 다 내려놓고 올 수 있게 해주세요. 혹여, 아무것도 없이 돌아오더라도 그것 때문에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