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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박타박 아홉걸음
유럽에서 장기간 캠핑카 여행을 할 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나는 다른 무엇보다 인터넷 사용이라고 생각한다.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달라졌으니 여행하는 방법 또한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코로나19를 겪은 전 세계는 ‘비대면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번 5주 간의 여행 동안 우리 가족은 현금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유로화와 달러화를 조금씩 준비해 갔으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순간까지 현금은 그대로였다. 캠핑장에서도 No Cash가 보편적이었고, 중요한 결제는 대부분 온라인에서 이루어졌다.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에서도 환전이 필요한 순간도, 환전할 기회도 없었다.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노르웨이에 ..
사람들은 설레기 위해 연애를 한다고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말했다. 연애를 못 하는 사람 또는 하면 안 되는 사람들은 설레기 위해 여행을 한다고 나는 말했다. 연애를 못 하는 전자는 나와 고래이고, 연애를 하면 안 되는 후자는 부모님과 동생 내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설렘이라는 감정을 선물하기 위해서다. “우와~ 이런 건 처음이야.”캠핑카가 커다란 페리에 실렸다. 막상 해보면 어려운 일은 하나도 없다.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 거니까. 그래도 처음은 언제나 두렵고, 그 두려움에 비례하여 설레는 마음도 커진다. 캠핑카에서 자는 것도 처음이지만, 페리에서 잠을 자는 것도 다들 처음이었다. 주차를 마친 후 16시간의 항해 동안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
“준비 완료, 출발합시다!”Waze 내비게이션 앱이 경쾌하게 외쳤다. 지난 한 달 동안 약 1만km를 직접 운전하고 다니면서 안전하게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건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힘이 컸다.이 세상 모든 분야가 다 그렇겠지만, 여행도 스마트폰 등장 이전과 이후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이십 대 초반에 혼자 인도를 여행할 때는 스마트폰이 없었다. 그때는 지도책을 보고 다녔고, 가이드북을 경전처럼 모시고 다녔다. 모든 게 정확하지 않았고, 확실한 건 없었기에 골목 하나를 돌 때마다 사람들에게 물어야 했다. 물론 음성 언어로 소통이 가능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낯선 여행지에서 여행자들은 언제나 크고 작은 사기를 당했고, 여행자들이 만나면 그것은 곧 무용담이 되었다. 그때 나의 경전이었던 를 쓴 ..
오늘은 독일 소도시 워킹투어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이면 부모님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고, 동생은 여름 휴가를 받아서 드디어 3대가 함께 캠핑카에 올라탄다. 고래양의 유치원은 이미 오래 전에 여름방학을 시작했다. 한가로운 나만의 아트 투어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 이어 마지막으로 선택한 소도시는 바로 데사우(Dessau)다. 데사우는 독일 바우하우스(Bauhaus) 운동이 전성기를 맞았던 곳이다. 고전미술에서는 예술의 변방에 머물렀던 독일이 바우하우스의 등장으로 모더니즘 예술의 정점에 올라섰다. 특히 산업 디자인과 현대 건축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니, 지금도 바우하우스 정신을 목표로 삼고 좇아 가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바우하우스를 모르더라도 이케아, 무인양품..
독일의 어느 도시가 그러하든 드레스덴 역시 구시가지를 돌아보는 데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는다. 아름다운 야경으로 유명한 체코의 수도 프라하까지 자동차로 2시간 정도의 거리이기 때문에 해가 긴 여름 시즌에는 하루만에 두 도시를 모두 여행할 수 있다. 하지만 엘베의 피렌체로 불리는 드레스덴의 예술적 역량은 단지 바로크 풍의 도시 외관에만 있지 않다.오전 동안 드레스덴 구시가를 타박타박 걸 어다니다가 오후에는 츠빙거 궁전에 있는 드레스덴 고전회화 미술관(Gemäldegalerie Alte Meister)을 둘러본 후 가장 최근에 복원이 완료된 젬퍼 오페라 하우스(Semperoper Dresden)에서 공연을 보고 나와서 드레스덴의 야경까지 충분히 즐기는 것이 드레스덴 여행의 완성이다. 어느 곳도, 어느 것도 ..
캠핑카를 타고 아름다운 풍경을 벗삼아 하루에 1,000km 이상 달려도 피곤한 줄을 모른다. '우와, 우와, 진짜 멋있다'를 몇 번 하다보면 어느새 다음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런데 덩치가 큰 캠핑카를 몰고 도심을 벗삼아 트램과 함께 달린다면 여행 장르는 호러물로 바뀐다.유럽에서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 어느 도시나 트램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트램을 뒤따르기도 하고, 트램이 나를 뒤쫓기도 한다. 한국 사람들은 트램을 기차나 지하철 정도로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버스에 더 가깝다. 그러니 트램이 내 앞이나 뒤에 있으면 긴 버스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노르웨이 트론헤임에서는 24m 길이의 트램 같은 버스가 운행 중이었다. 자동차가 보는 신호와 트램이 보는 신호가 다르긴 하지만 그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
나는 지금 호치민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베트남에어라인 항공기의 가장 끝자리에 앉아 창밖의 일출을 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호치민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국적기 직항이 있다는 게 놀랍다. 10년을 먹어도 적응이 안 되는 고수가 기내식에도 들어 있다는 데에 또 놀랍다. 호치민은 국제적인 도시였고, 고수는 국제적인 식자재였다. 해외 생활이 곧 10년 차에 접어들지만 나의 세계관은 여전히 좁다는 데에 마지막으로 놀랍다. 김영하 작가의 데뷔작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남자는 결국 어떻게 됐을까? 나도 엘리베이터에 끼었던 적이 있었다. 물리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그런 일은 존재한다. 10년 전 부산 수영 현대아파트의 오래된 엘리베이터에 낀 나는 세계일주를 하겠다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배낭을 멨다. 당시 30대..
꽤 오래된 스니커즈 그 허름한 편안함널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렘 자꾸 걸음이 빨라져음 너와 둘이서 걸으면 말야왠지 좋은데로 가는 기분이야 어디라도 난 좋은걸바람이 분다 웃는다햇살은 부서진다공기가 달다 참 좋다청춘은 또 빛난다반짝여라 젊은 날 반짝여라 내 사랑- 딕펑스, 'VIVA 청춘' 노랫말 중에서 뉴욕에서 처음 맞는 주말이다. 여행자에게 주말과 평일이 뭐가 다르겠냐만은 그래도 주말이란 언제나 설레는 말이다. 며칠 간 오락가락 하던 날씨도 이제야 여름임을 알아차렸는지 하늘이 화창하다. 며칠 만에 햇볕이 보인 건 좋은데.. 근데 너무 내려쬔다. 숙소를 나서자마자 목덜미가 따끔거린다. 지하철 역까지 가는 사이에 벌써 옷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에어컨 빵빵한 뉴욕 지하철을 기대하며 역에 도착했다. '어라?' 주..
뭐가 의미 있나 뭐가 중요하나 정해진 길로 가는데 축 쳐진 내 어깨 위에 나의 눈물샘 위에 그냥 살아야지 저냥 살아야지 죽지 못해 사는 오늘 뒷걸음질만 치다가 벌써 벼랑 끝으로 어차피 인생은 굴러먹다 가는 뜬구름 같은 질퍽대는 땅바닥 지렁이 같은 걸 그래도 인생은 반짝반짝 하는 저기 저 별님 같은 두근대는 내 심장 초인종 같은걸, 인생아- 옥상달빛, '하드코어 인생아' 노랫말 중에서 그림 같은 걸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도대체 뭘 그려 놓았는지도 모르는 추상 미술을 앞에 두고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으면 뭔가 심오한 깨달음이 생기기라도 하는 걸까? 먹고 살기도 바쁜데 그림을 본다고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왜 그림을 보러 다니는 걸까? 이런 질문을 진짜로 받는다면 뭐라고 해야할까? 나는 그림 ..
비가 내려 비가 축축하늘에서 비가 축축비가 내려 비가 축축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걸까비가 내려 비가 축축하늘에서 비가 축축비가 내려 비가 축축하늘 위 구름이라도 우는걸까- 아마도 이자람 밴드, '비가 축축' 노랫말 중에서 혼자 타박타박 걸어다니는 배낭여행을 남들이 보면 세상에 없는 한량이고 신선놀음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렇게 한가하게 보내는 날은 거의 없다. 여기까지 날아온 비행기 티켓값과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쌓여가는 숙박비를 생각하면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도 '하나라도 더 보고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주섬주섬 점심 도시락을 챙기고, 물을 가득 채워 가방에 넣고 숙소를 나선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길을 걸으며 틈틈이 메모한 것들을 펼쳐 놓고 일기도 쓰고 사진도 정리해야 한다. 그 동안 여행하면서 찍은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