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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박타박 아홉걸음
타박타박 아홉걸음 세계일주 52 :: 뉴욕, 이곳은 꿈으로 건설된 도시입니다. 본문
꽤 오래된 스니커즈 그 허름한 편안함
널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렘 자꾸 걸음이 빨라져
음 너와 둘이서 걸으면 말야
왠지 좋은데로 가는 기분이야 어디라도 난 좋은걸
바람이 분다 웃는다
햇살은 부서진다
공기가 달다 참 좋다
청춘은 또 빛난다
반짝여라 젊은 날 반짝여라 내 사랑
- 딕펑스, 'VIVA 청춘' 노랫말 중에서
뉴욕에서 처음 맞는 주말이다. 여행자에게 주말과 평일이 뭐가 다르겠냐만은 그래도 주말이란 언제나 설레는 말이다. 며칠 간 오락가락 하던 날씨도 이제야 여름임을 알아차렸는지 하늘이 화창하다. 며칠 만에 햇볕이 보인 건 좋은데.. 근데 너무 내려쬔다. 숙소를 나서자마자 목덜미가 따끔거린다. 지하철 역까지 가는 사이에 벌써 옷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에어컨 빵빵한 뉴욕 지하철을 기대하며 역에 도착했다. '어라?' 주말 내내 공사 중이라고 셔틀버스를 타라고 써있다. '괜찮아. 오늘은 주말이니까!' 덕분에 뉴욕에서 처음으로 버스를 타보게 됐다. 뉴욕 시내버스는 어떤 모습일까? 별것 아닌 일에도 기분이 좋았다. 버스를 타기 전까지는...
뉴욕은 오래된 도시의 역사답게 주말이나 야간에 지하철 공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일부 구간의 지하철 운행이 정지되면 해당 구간은 셔틀 버스가 운행된다. 대체 노선이 많은 맨해튼에서는 셔틀 버스가 없으니 알아서 다른 노선을 이용해야 한다. 특히 주말에는 반드시 어딘가에서 공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행자라면 평소 자주 이용하는 역의 상황을 그때그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낯선 도시에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인 것은 구글맵에서 공사중인 노선 정보가 실시간으로 제공되고 길찾기를 누르는 시점에서 변경된 노선까지 함께 안내를 하니까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 늘 다니던 길이라도 언제 노선이 변경될지 모른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게 좋다. 그나저나 구글은 이미 지구를 정복했나보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즐거운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하지만 버스 안의 상황을 마주하자 내 마음은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셔틀 버스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콩나물 시루가 따로 없었다. 교통체증은 또 얼마나 심한지, 걷거나 지하철을 탈 때에는 남의 일이었던 뉴욕의 교통체증을 무거운 배낭을 매고 만원버스 속에 실려서 직접 겪으니 너무 괴로웠다. 뉴욕에서 시내버스 타본다고 좋아라 했던 마음 같은 건 이미 없어졌고, 뉴욕에서 다시는 버스를 타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이렇게 다르다니, 스스로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겨우겨우 지하철로 옮겨 탔더니 거기가 천국이었다. 천국과 지옥은 항상 내 옆에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점점 도를 닦아가고 있다.
오늘 목표는 첼시를 구석구석 걷는 것이다. 뉴욕에는 주말마다 시내 곳곳에서 플리마켓(Flea Market 벼룩시장)이 열리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곳이 바로 첼시의 헬스키친(Hell's Kitchen)에 있었다. 헬스키친이란 지명은 과거에 이 동네가 온갖 흉악범죄의 온상이라 경찰관들이 여기를 지옥이라 했는데, 나중에는 지옥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지옥의 주방'이라고 부르던 것이 그대로 동네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보통 지명의 유래에는 신화나 전설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미국은 역시 달랐다. 근현대사가 살아 숨쉬는 무서운 지명이었다. 그래서인지 미들타운에서 몇 블럭 비켜났을 뿐인데 동네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미들타운과 달리 낡고 오래된 건물이 거리에 많았다.
플리마켓이 허드슨 강변이 근처라서 가는 길에 강가로 나갔더니 웬 항공모함이 강가에 정박 중이었다. 퇴역한 항공모함인 인트레피드(Intrepid)호를 개조하여 해양항공우주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모형이 아닌 실제 항공모함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티비에서야 많이 봤지만,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웠는데 진짜 컸다. 실제로 마주했지만 얼마나 큰지 여전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카메라에 담아 보려고 한참을 멀리 떨어져서 찍어도 다 담을 수가 없어서 고작(?) 배 한 척 찍으려고 파노라마 기능까지 써야했다.
항공모함에도 올라가보고 싶고 흥미로운 전시도 많을 것 같아서 한번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입장료가 너무 비쌌다. 게다가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는 우주왕복선이나 콩코드 여객기를 보려면 또 추가 비용을 내야한다고 써 있었다. 박물관 내부를 가장 편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항공모함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먼저 다녀 온 사람들의 글과 사진을 인터넷으로 보며 무료 박물관 투어를 마쳤다.
플리마켓으로 걸어가는데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괴로웠다. 플리마켓에 가면 이 뜨거운 열기를 식혀줄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타박타박 걸었다. 사진으로 보았던 그 플리마켓 장소에 도착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음? 내가 잘못왔나? 하고 지도를 봤는데 지도 역시 분명하게 '네가 서 있는 곳이 헬스키친 플리마켓이야.'하고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웨스트 39번가 한 블록 전체가 플리마켓이라고 했는데 기대했던 플리마켓의 왁자지껄한 모습은 없고 작은 공터에 몇 개의 텐트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더워서 다들 집에 갔나? 뉴욕 플리마켓에서는 뭔가 고대의 유물이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이 거래되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다 옛말인지, 그냥 딱 쓸쓸한 모습이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은 헬스키친 플리마켓의 잊혀진 영광 같은 것이었다. 혹시나해서 일요일에 또 갔는데 똑같은 상황이었다.
다시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 첼시의 명소인 하이 라인 파크(High Line Park)로 향했다. 내 마음대로 꼽은 오늘의 메인 이벤트였다. 너무 더워서 공원에 가기 전에 수퍼마켓에 들러 시원한 음료수를 사려는데, 보통 생수보다 레모네이드 가격이 더 저렴했다. 음... 분명히 주스는 맹물에다가 뭔가를 더했을텐데 맹물보다 값이 싸다니, 양자요동이 일어날 때 생긴다는 반물질 같은 건가? 더했는데 오히려 줄어드는.. 아무튼 미국은 희안한 곳이다. 양도 주스가 더 많았다.
공원 입구에 도착해서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플리마켓에서 받은 실망을 하이 라인 파크가 완전하게 없애주었다. 하이라인은 1934년부터 1980년까지 운행된 도심 속 화물노선을 공원으로 바꾼 곳인데 고층빌딩 사이로 지나가는 철길을 따라 걷는 재미가 정말 쏠쏠했다. 맨해튼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풍경을 맞닥뜨리는 경우가 자주 있었는데 주로 공원을 갔을 때 그랬다. 이렇게 현실감이 떨어지는 공간 속으로 사람들이 걸어 들어가고 그곳에 앉아서 여유를 즐기는 것이 일상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뉴욕에 더욱 애정을 갖게 되는 것 같다.
30년이나 방치되어 있던 기찻길을 공원으로 바꾼 것은 시민들의 노력이었다. 시의회 공청회에서 기찻길을 공원으로 바꾸자는 시민들의 의견에 대해 개발업자들이 불가능한 몽상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에 대해서 뉴욕 도시계획 담당자 아만다 버든(Amanda Burden)은 말했다.
“꿈을 꾸는 게 언제부터 나쁜 일이 되었죠? 이곳은 꿈으로 건설된 도시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꿈을 좇아야 합니다.”
뉴욕에 와서 내가 인상적이라고 느꼈던 많은 장소들이 아만다 버든의 도시 계획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만다 버든은 공공의 장소(Public Spaces)가 갖는 힘에 대해서 강조하며 경제적 이익을 앞세우는 개발업자들과 항상 맞섰다. 그리고 뉴욕 곳곳에 공원을 조정하고 공공의 영역이 오롯하게 공공을 위한 장소가 되도록 힘썼다.
"공공장소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이용하느냐가 아니라, 그곳이 있음을 앎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더 기분 좋게 생각하게 됩니다. 공공장소는 당신이 도시에 머물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브라이언트 파크는 아만다 버든의 작품은 아니지만 그 곳에 처음 갔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녀는 정확하게 표현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고층빌딩과 지옥같은 교통체증 밖에 없는 뉴욕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도 또 왜 싫어하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그녀의 전공이 도시공학이 아니라 동물행동학이었다는 것이 자본이 아니라 사람을 향하는 도시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이론적 배경이기도 할 것이다.
하이 라인 파크는 수많은 이해 관계가 똘똘 뭉친 탓에 2.3km의 길지 않은 거리지만 총 3단계로 나눠서 공사를 시작해야 했고 2006년에 시작된 공사는 최종적으로 2014년 9월에 끝이 났다. 도심이지만 도심이 아닌 하이 라인 파크에서는 빌딩숲을 걸으며 야생화를 볼 수 있고, 빌딩숲을 걸으며 맨발로 물길을 헤쳐나갈 수 있고, 빌딩숲을 걸으며 책을 읽고, 빌딩숲을 걷다가 선베드에 누워서 일광욕도 할 수 있다. 1시간 정도의 산책만으로도 '그곳이 있다는 것을 앎으로써 생기는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한 애정'이 무엇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사는 곳에 하이 라인 파크가 있다는 것만으로, 숨이 턱턱 막히는 도시 생활 중에 내가 갈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뉴욕에 대한 애정이 솟아 오르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스쳐지나갔던 많은 도시들도 결국 공공의 공간에 대한 이미지가 그 도시의 인상을 만들고 있었다. 뉴욕에 대한 기사를 쓰기 시작하니 포털사이트에 댓글이 평소보다 훨씬 많이 달렸다. 제대로 살아보지 않아서 뉴욕이 얼마나 지옥인지 모른다는 지적이 많았다. 한국에서 내가 살던 동네 역시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지옥이나 다름 없는 천박한 곳이었다. 그곳이 얼마나 지옥인지 사흘 밤낮으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있는 우리 동네는 수영천을 따라 자전거를 탈 수 있고 수변공원까지 밤낮으로 조깅을 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동네다. 다른 도시를 다녀보니 역설적으로 내가 살던 동네가 더욱 그리워진다.
나는 서울역 앞 고가공원 '서울로 7017'이 완공되기 전에 여행을 시작해서 아직까지 그곳에 가보지 못했다. '그곳이 있다는 것을 앎으로써 생기는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한 애정'을 서울에서도 느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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