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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박타박 아홉걸음
타박타박 아홉걸음 세계일주 48 :: 뉴욕 센트럴 파크, 어디까지 가봤니? 본문
너의 고운 두손 가득히 나의 꿈을 담아 주고서
이대로의 너의 모습을 사랑하고 있다고
저기 멀리 보일 것 같은 우리만의 희망 찾아서
사랑스런 너의 꿈속에 언제나 달려가리
- 오장박, '내일이 찾아오면' 노랫말 중에서
아스토리아의 숙소 앞에는 초등학교가 있다. 그리고 학교 앞에는 늘 노란색 스쿨버스가 서 있다. 매일 아침 숙소를 나서면서 만나는 스쿨버스는 그동안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봤지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다. 낯설어야 할 저 버스가 나는 볼 때마다 반갑고 기분이 좋았다
미국과 캐나다가 법적으로 스쿨버스 색깔을 노란색으로 지정한 것은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이다. 스쿨버스 관련 교통법규만 놓고보면 미국 아이들이 우리보다 더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에서는 스쿨버스가 멈춰 서고 학생들이 승하차를 할 때 뒷차가 멈추는 것은 당연하고 옆 차선으로 추월해서 지나가서도 안 된다. 스쿨버스의 문이 열리면 운전석 쪽에 STOP 표지판이 펼쳐지는데 중앙분리대가 없는 2차선 도로라면 마주오는 차량도 학생들의 승하차가 끝날 때까지 정지해야 한다. 아이들이 스쿨버스에서 내려 바로 길을 건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아이들의 안전과 관련한 다양한 법규가 제정되고는 있지만 우선 순위에서는 늘 뒷전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지방선거가 끝나자 역시나 대대적인 교육제도 개편안과 대입제도 개선안이 나왔다.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교육은 수많은 개인들의 욕망과 각계각층의 이해관계가 모여서 끓고 있는 용광로 같다. 거창한 역사적 책무를 떠나서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라서 내가 노후에 살아갈 우리 사회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기성세대는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 노란 버스를 보며 메리 보탐 호위트의 시가 떠올랐다. 학교에서 캘리그라피 동아리를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적었던 글이다.
신이 우리에게 아이들을 보낸 까닭은
신께서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는 뜻이다.
- 메리 보탐 호위트 '신이 우리에게 아이들을 보내는 이유' 중에서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작정하고 센트럴 파크를 걸어보기로 했다. 남쪽에서 북쪽 끝까지 직선 거리만 4.1km니까 전부를 둘러보려면 반나절은 계속 걸어야 할 크기다. 출발 지점은 콜럼버스 광장이다. 공원 입구에 도착하니 콜럼버스가 아주 높은 탑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이들에게 콜럼버스는 어떤 사람일까? 건국 신화가 없는 나라 미국에서 콜럼버스는 우리의 단군 할아버지 정도 되는 걸까? 미국 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10월 12일을 콜럼버스의 날로 정하고 축제를 한다. 미국은 10월 둘째 주 월요일로 콜럼버스 데이를 바꾸고 공휴일로 지정하여 학교나 공공기관이 쉰다. 콜럼버스 동상은 센트럴 파크 입구에도 있고, 공원 안에도 있고, 보스턴에도 있고, 제노바에도 있고, 바로셀로나에도 있다. 그들은 무엇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것일까? 콜럼버스 동상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참 불편하다.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마차들을 지나 공원 안으로 들어서니 녹음의 향연이 펼쳐졌다. 해질 무렵 잠깐 둘러 본 센트럴 파크와 한낮의 화사함을 안고 있는 센트럴 파크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갑자기 시야가 환해지는 들판이 나왔다. 과거에 양을 풀어 놓고 키웠다는 Sheep Meadow였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잔디밭이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들판을 바라봐야만 했다.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같았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들이 모여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북이탈리아의 볼차노(Bolzano)에서 보던 넓은 들판과 푸른 하늘 사이에 다만 지평선 대신 맨해튼의 마천루가 자리잡고 있었다. 센트럴 파크가 아니면 결코 볼 수 장면일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까만 중절모를 쓴 신사가 까만 우산을 들고 저 풍경 속으로 걸어갈 것만 같았다.
잔디밭 위로 점점이 있는 사람들은 빌딩 그늘에 살고 있어서 햇볕이 그리운 탓인지 뜨거운 햇볕 아래에 누워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눈이 너무 부셔서 책장에 인쇄된 글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 자리를 깔고 누워서 또 간이 의자에 앉아서 다들 책을 읽고 있었다. '여유란 이런 거야.'하고 나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저 파란 하늘 아래에는 무엇이 있든 어울리지 않을까. 들판을 나와 발걸음을 옮기니 이번에는 넓은 잔디밭 대신 그림 같은 호수가 있었다. 호숫가 분수대에서는 거리 공연이 펼쳐졌고 커다란 비눗방울 속에서 아이들이 자지러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햇빛에 반짝이는 비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세그웨이를 탄 청년들이 커다란 목걸이를 목에 걸고 나에게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목에 걸고 있는 건 목걸이가 아니라 커다란 노란색 뱀이었다. 나는 뱀을 너무 무서워해서 뱀 인형도 가까이 하지 못하는데 그 청년들이 살아있는 뱀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비눗방울 속 아이들처럼 자지러지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뒤로 나자빠졌다. 땅바닥에 주저 앉아 엉금엉금 뒷걸음질 치고 있으니 이 청년들 "오~ 쏘리!" 하고 그냥 가버린다. 뭐 이런... 하지만 뭐라고 화를 냈다간 그 청년들 아니 그 뱀이 다시 올 것 같아서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듯 툭툭 털고 일어나 도망갔다.
호숫가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내가 여행을 하면서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건 바로 여행지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이곳 저곳을 여행 다니지만 어디를 가든 내가 하는 일은 똑같다. '우와~ 여기가 바로 거기구나.'하고 감탄을 한 다음에 카메라를 꺼내서 '찰칵' 그리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나중에 찍은 사진을 다시 보는 일도 드물고, 찍어 놓은 사진이 그 순간의 내 마음을 다 담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내가 본 그 풍경과 모니터 속 사진은 전혀 같지 않다. 더군다나 인터넷에는 나보다 훨씬 사진을 잘 찍는 사람들의 사진이 이미 차고 넘쳤다. 다만 내가 찍은 사진이 그날 그 자리에 내가 있었음을 나보다 더 잘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사진을 계속 찍고 있다.
멋진 청년이 자리를 잡고 앉아 파레트를 꺼내고 음료수 컵에 물을 담아 슥슥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찍은 사진과는 전혀 다른 이 곳의 풍경이 그의 작은 스케치북 속에 있었다. 그의 그림 속에 있는 센트럴 파크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세상 어디를 가든 자신만의 눈에 비친 자신만의 풍경을 오롯하게 간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들으면 어떤 이야기를 할지 모르겠지만, 여행을 다니면 다닐수록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센트럴 파크를 남쪽에서 북쪽까지 쭉 걸어야겠다고 시작한 산책인데 중간에 자꾸만 길을 잃는다. 숲이 워낙 울창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길이 정말 복잡했다. 센트럴 파크는 철저하게 사전에 계획된 인공적인 공원인데 일부러 길을 잃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길이 복잡했다. 이 문제는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공원을 설계할 때에도 제기된 문제였다는데, 알고보니 센트럴 파크를 계획할 때부터 사람들이 길을 좀 잃기도 하면서 숲을 더 많이 걸을 수 있도록 의도된 것이란다. 대신 숲속의 가로등에 붙은 번호표 체계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언제든 확인할 수 있도록 해놓았단다. 길은 그대로인데 세상은 변해서 나는 가로등의 번호표가 없어도 내가 길을 잃었다는 것과 어디로 가야할지를 오직 구글맵을 통해 확인하며 숲속을 헤쳐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더 울창한 숲을 지나고 더 큰 호수를 지났다. 센트럴 파크 북쪽 끝에 도착해서 컬럼비아 대학교 캠퍼스를 향해 걸어가다가 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The Cathedral Church of St. John the Divine)에 들렀다. 완공되면 뉴욕을 대표할 건축물이 될 이 성당은 1892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아직도 공사 중이었다. 무려 126년 째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1882년에 시작되어 지금도 공사를 계속하고 있는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다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2026년 완공 예정인데 반하여 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의 완공은 2050년을 예상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공사를 하길래 앞으로도 32년이란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 그나저나 70살의 내가 이 성당 앞에 다시 선다면 오늘을 기억할 수 있을까? 갑자기 더 부지런히 걷고 더 열심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공사 중이긴 하지만 현재 성당 정면 파사드는 완성이 됐고, 성당 내부도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성당을 둘러보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게다가 감사하게도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데 따로 입장료는 없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해 들어오는 빛이 내부를 보라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성당 안에는 다양한 예술품도 많고 팝 아티스트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마지막 작품도 있다고 해서 예배당 안쪽으로 더 들어가려니 성당 입구의 나무문을 지나려면 입장료를 내야했다. 나무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신비한 보라색을 구경하다가 사진 한 장 찍어 놓고 2050년을 기약해야지 하고 돌아나오는데 관리인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티켓도 안 사고 사진을 찍어서 그런가보다 하며 갔더니 멀리서 보지 말고 여기까지 와서 보고 사진도 찍으라고 했다.
무덤덤한 말투였지만 가까이 와서 보라는 그 아저씨의 이야기에 뭔가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얼마나 많은 관광객이 여기를 찾아오고 나와 똑같이 멀리에 서서 구경하고 갈텐데 굳이 불러서 가까이서 보고 가라고 이야기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저씨 덕분에 나무문에 가리지 않는 성당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머리를 숙여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성당을 나왔다.
성당 밖에는 어린이 조각공원이 있었는데 가운데 있는 조각상은 전혀 어린이스럽지 않았다. 대천사 미카엘이 칼을 들고 사탄을 처치하는 장면을 표현한 조각상이었다. 대천사 미카엘이 자른 사탄의 머리가 미카일이 밟고 서 있는 거대한 게의 집게발에 걸려 있었다. 교훈적 메시지인지 종교적 메시지인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저 공포스러웠다. 엄청 멋지긴 하지만 대체 어떤 장면을 표현했길래 이런 동상이 어린이 조각공원에 있나 싶어서 열심히 찾아 읽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아이들을 위한 노란색 통학버스와 어린이 공원에 있는 목이 잘린 사탄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라니. 세상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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