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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 한 사람의 삶은 온 우주만큼 소중하다. 본문

영화

귀향 :: 한 사람의 삶은 온 우주만큼 소중하다.

한성은 2016. 3. 2. 14:03
개봉한 날부터 망설였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지만, 객석의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할 의무감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보기를 계속 미뤘습니다. 사실 안 보고 싶었습니다. 이 정도 고민하는 것만으로 도덕적 의무감을 다 한 것으로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단순한 이유였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무섭고 두려울 테니까.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보며 그들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슬픔게 아니라 영화를 보는 내내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 잡아야 하고, 경직된 상태로 런닝타임 내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안 보고 싶다’하는 것은 내가 나를 아끼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였습니다. 

부산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저는 그냥 아이들에게 떠넘겼습니다. 수도권 지역으로 대학을 가는 학생들을 만나면 부탁했습니다. "대학생이 되면 뭐든 하고 싶은 것들 마음껏 해라. 다만 부탁이 하나 있는데 나를 대신해서 수요집회에 나가 달라."고 했습니다. 마리몬드社의 압화 작품 핸드폰 케이스와 노트를 소개하며 예쁘니까 갖고 싶으면 사라고 했고, VANK활동을 하던 아이에게는 고무 팔찌 공동 구매도 슬쩍 흘렸습니다. 결국 제가 무언가를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번에도 도덕적 의무감이 더 컸습니다. SNS 친구들이 많으니 소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그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해결해 주지 않을까. 그렇게 그냥 아이들에게 떠넘기며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마주 하기에는 너무 무섭고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는 슬프지 않았습니다. 슬픔을 느끼기에 앞서 배우 최리의 연기에 압도당하여 다른 감각이 무뎌질 정도였습니다. 개인적인 흥미로 내림굿, 진혼굿 등을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도 했고, 일부러 찾아가서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크린 속에서 벌어지는 최리의 진혼굿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 눈빛을 어떻게 표현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영화 후반부로 갈 수록 최리의 연기에 점점 압도당하여 다른 장면들이 잊힐 정도였습니다. 영화는 그랬습니다.


다만, 역시 영화는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저는 너무 무서워서 귀를 막아야 했고, 손발을 살짝 떨어야 했고,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 2시간 런닝타임이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온몸의 긴장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환한 낮이라 참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영화 ‘고지전’을 보고 밖으로 나왔던 새벽 1시에 너무 무서워서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해야 했고, 지금은 베트남에 있는 친한 형에게 전화를 하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던 기억이 났습니다. 낮이라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 서양과 한국의 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전쟁이라는 것을 단일 사건으로 추상화하며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뭔가 학자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쟁 전의 국내외 정세, 개별 전쟁의 전개 과정, 숫자로 표현된 사망자들의 수, 전쟁의 의미, 전행 이후 정치 지형의 변화 등등 추상화된 거대 담론으로 전쟁을 배웠습니다. 또 철학적인 관점으로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성찰, 전쟁의 정치∙경제적 논리 전개는 공부하면 할 수록 흥미로웠습니다. 그 시기에는 전쟁 영화도 그렇게 보았습니다. 큰 사건, 거대한 스케일, 작전의 전개 양상, 그리고 승자와 패자. 얼마 전 이스라엘에서 판매된 팔레스타인 공습 현장 관광 상품처럼 영화를 보았습니다. 날아가는 미사일의 불빛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던 관광객들이 마음속으로 ‘정의’를 외치듯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정확하게는 전쟁을 피상적으로 그려놓은 시원시원한 전쟁 영화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대학교 2학년 때 임레케르테스의 ‘운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을 보았습니다. ‘운명’에 대한 소개는 언젠가 꼭 따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홀로코스트 속에 있던 한 명의 인간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영화 ‘마션’에서는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전 세계가 힘을 합칩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속에 사라진 약 11,00,00,00명 (천백만 명으로 읽어도 됩니다) 속에 1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돌프 히틀러 1은 뚜렷하게 기억을 하지만요. 


영화는 일본군 성노예로 잡혀가 이제는 ‘위안부 할머니’라는 추상화된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겪어야 했던, 그리고 그렇게 죽어서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 혹은 숫자 1들의 이야기입니다. 일본 학자(요시미 요시아키)에 의해 추정되는 일본군 위안부 숫자 200,000명 (이십만 명) 속에 있던 1들의 이야기가 영화 ‘귀향’입니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슬픕니다. 그 시절에 내가 태어나지 않고, 그 일을 겪지 않아서 정말 진심으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거기에 감정이입을 하고 역지사지를 하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건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로만 한정하더라도 어떤 이유로든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학살된 일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있는 사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사건들을, 피해자들 속에 숫자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이 너무나 두렵습니다. 그 속에 내가 없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내가 그 속의 1로 남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무섭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 전쟁 중에 그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 지옥에서 살아 돌아와 그것보다 더한 지옥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영하 20도에 소녀상을 지키는 사람들, 타인의 아픔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사람들. 그들이 주는 돈을 받고 이 모든 것을 용서를 해주는 아버지와 딸. 이 영화를 기어이 완성하여 개봉시킨 7만 명이 넘는 사람들. 지금까지 벌어졌던 일들과 앞으로 벌어질 일들 속에 있는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다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숫자 1이 아니라 온 우주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삶과 내 생명이 온 우주와도 바꾸지 않을 만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삶과 당신의 생명이 소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