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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보내며

한성은 2016. 2. 19. 03:16

처음으로 학교 밖에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학교에 있으면서 담임으로서 가장 큰 불만이었던 것은 하나가 아이들과 오직 교실에서만 만난다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논다는 것이 최고경영자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가치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소심한 나는 책상 아래에 숨어서 욕만 했습니다. 안들리게.

학교 안의 공기와 학교 밖의 공기는 다릅니다. 다른 공기를 마시면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다른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컨베이어 벨트 위의 제품이 아니고, 나 또한 교육방송 영상이 아닌데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학교와 교실을, 교사와 학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의 의미는 상대적입니다. 교실 밖을 알아야 교실 안에 대한 의미 부여가 가능해집니다. 

내 옆의 친구가 내신 성적 경쟁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피자 뷔페에서 내가 마실 콜라도 기꺼이 대신 가져다주는 콜라 셔틀로도 존재하고, 엄마에게 오후까지 수업이 있다고 거짓말도 같이 해주는 공범자로도 존재하고,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손난로로도 존재한다는 것을 아이들이 잘 모릅니다.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오롯하게 스스로 깨쳐야 하는데 대한민국 17살 소녀에게는 그럴 겨를이 참으로 없습니다. 저의 탓입니다.

라캉의 거울이론을 굳이 가져오지 않더라도. 우리 각자의 존재 의미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이 세상에 악마가 없다면 ‘천사’라는 의미와 그의 존재 가치는 발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최고경영자는 자신이 주문하는 절대적인 가치(당신만의 절대적 가치가 곧 상대적 가치라는 역설은 어쩔…)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봐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가치가 부정당하면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과 같다는 불안이 있었겠지요.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그리도 싫어하고 겁이 났나 봅니다.

퇴직을 하고 학교 책상을 정리하고 교직원 회식과 우리반 회식이 동시에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아이들은 자라면서 곧 나를 잊을 테고, 교직원들은 동료 교사였던 나와 앞으로도 계속해서 도움을 주고 받을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교직원’ 보다는 ‘선생님’이 더 좋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만들 세상에서 내가 노년을 보내야 하므로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내 행복을 위하여, ‘나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란다’고 선뜻 이야기할 수 있는 ‘선생님’이 좋습니다.

퇴사 후 마지막으로 학교 밖에서 처음으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