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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 버스 1 :: 비합리적지만 효율적인 질서 본문
여행 시작
3박4일의 일정으로 일본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세계 일주에 앞서 여행 감각을 좀 익혀볼 요량으로 계획한 짧은 여행이었습니다. 저는 인터넷 중독증이 있기 때문에 이번 여행을 통해서 인터넷 접속이 제한된 환경에서 어떻게 여행을 할 것인가를 배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10년 전 인도를 여행할 때에는 오직 지도와 감각, 임기응변이 전부였습니다. 최근에는 다양한 모바일 기기 덕분에 여행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고 하니 일단 한 번 나가보자 싶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역사에 대해서도 좀 배워볼 요량으로 교토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전공이 국어교육과 사학인데 일본 역사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바람의 검신에 나오는 켄신이 일본 근대사 선생님이십니다. 그래서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4권과 위키피디아를 통해 겉핥기나마 간단히 공부를 하고 갔습니다.
교토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 옮기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일본 교토 여행 중에 인상 깊었던 일본의 시내버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시내버스로 한정한 것은 광역버스를 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데, 어차피 일본은 도시와 도시를 잇는 것은 잘 짜인 기차와 지하철이 담당하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광역버스 탈 일은 드물다고 합니다. 사실 같은 이유로 일본 여행객들은 시내버스 탈 일도 극히 드뭅니다. 다만 교토는 버스가 도시 전체를 촘촘히 연결하고 있어서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시내버스를 타고 여행을 합니다.
외곽에서 들어오는 점선이 Railway 이고 다양한 색깔의 실선이 Buses 입니다. 교토 버스 패스를 사면서 받은 지도입니다. 처음에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나중에는 익숙해지니 이 지도 한 장만으로 교토 전역을 구석구석 잘도 찾아다녔습니다.
버스 정거장
일본 사람들은 버스 정거장에서 한 줄 서기를 합니다. 우리나라 화장실의 한 줄 서기 같은 방식입니다. 우리나라는 버스 정거장에서 대체로 줄을 서지 않습니다. 줄을 선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버스 정거장에서 화장실과 같은 한 줄 서기를 하는 것은 불합리할 수 있습니다. 화장실은 어떤 칸에 들어가더라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한 줄로 서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화장실 문마다 각각의 줄을 선다면 현재 내가 서 있는 화장실 칸을 이용하는 사람의 습관과 컨디션에 따라서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대기하는 시간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대형마트 계산대를 생각하면 쉽겠습니다. 그래서 화장실 한 줄 서기는 굉장히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잠깐 대형마트 계산대도 한 줄 서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쓰고 대형 마트가 중소 상인들을 몰락시키는 것을 걱정합니다.).
하지만 버스 정거장은 다릅니다. 모두가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앞 사람이 내가 타려는 버스와 다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왜 한 줄을 설까? 아주 합리적인 방법으로 버스 노선마다 줄을 다르게 서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실제로 서울 강남역 같은 교통 중심지에서는 버스 노선마다 줄이 다릅니다. 어쩌다 엉뚱한 줄에 서 있으면 낭패를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앞 사람에게 “여기가 xxxx번 타는 줄 맞아요?”라고 묻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대부분 버스 정거장에서 한 줄 서기를 했습니다. 처음 JR 교토역에 도착해서 예약해 둔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거장에 가니 버스 정거장 기둥이 하나였습니다. 한국에서처럼 기둥 근처에서 버스 시간표를 보면서 서 있으니 사람들이 한 줄로 나란히 서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뻘쭘하니까 줄을 같이 섰습니다. 마침 제가 탈 버스가 왔습니다. 그런데 앞 사람이 안 타고 가만히 있습니다. 읭? 앞 사람은 이 버스 안타네? 그럼 내가 앞으로 가야지. 라고 생각하는 그 짧은 순간 줄 뒷편에 있던 사람들이 앞으로 좀비처럼 흔들흔들 걸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얼른 줄에서 빠져나와 버스에 올라타났습니다. 내 머리가 좋아서 망정이지 뒷 사람이 나와 같은 프로세스를 더 빨리 처리하여 나보다 앞으로 가서 내가 타려는 버스를 탈 수도 있겠군. 하며 줄을 왜 이렇게 불합리하게 설까 생각했습니다. 승리의 질서 일본이라던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구나. 하며 저의 비판적 통찰력에 스스로 감탄을 했습니다.
교토역 버스 정거장은 환승까지 하는 큰 정거장이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갔는데 숙소 앞의 작은 버스 정거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너명이 서 있는데도 한 줄 서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자기가 타려는 버스가 오면 줄에서 빠져나와 앞으로 가서 탔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이 방식은 몇 가지 조건 때문에 굉장히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었습니다.
버스 정거장의 구조와 버스 정차 위치
어떤 버스 정거장이든 버스에 승차할 수 있는 폭 2m 정도의 공간(두 사람이 지나갈 정도)을 제외하면 안전 펜스로 막혀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오는 버스를 향해 인도 아래로 내려설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좁은 공간으로 승차를 해야하니 한 줄을 서야 했습니다. 그리고 버스 정차 위치입니다. 버스들이 마치 지하철처럼 승차 위치에 정확하게 정차를 하고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줄에 서야하는 것이었습니다.
잠깐 우리나라를 생각해봅니다. 서울역이나 강남역 같은 거대한 버스 환승 센터에서는 버스 노선별로 버스 승차 지점이 있다지만, 대체로 버스가 오면 버스의 정차 예상 지점을 향해 우루루 움직입니다. 그러다보면 도로로 내려서는 사람도 간혹 생깁니다. 이때 모든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기대합니다. 저 버스가 내 앞에 딱 섰으면 좋겠다! 버스 기사님도 같은 이유로 버스 정거장으로 바짝 붙어서 정차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린 곳을 피해서 정차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버스 승차 지점을 향해서 길게 줄을 서게 됩니다. 승하차 안전사고를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교토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작은 버스 정거장에 몇 대가 동시에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버스들은 정차했고 하차 승객들이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버스를 타려고 버스 쪽으로 갔는데 승차는 불가했습니다. 바로 몇 미터 앞인데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늦은 시간이라 정거장에 승객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열어주지 않는지 몰랐습니다. 앞차가 떠나고 버스가 정확한 승차 위치에 정차하고 나서야 뒷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참 유도리 없다고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차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기다리는 버스가 서로 다른 데도 불구하고 한 줄 서기를 할 수 있는 것은 프로세스 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 버스 승객들과 일본의 버스 승객들의 차이는 신뢰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줄을 서 있으면 버스는 반드시 승차 위치에서 정차한다. 늦게 온 사람이 우연한 기회로 버스 정거장을 조금 벗어난 곳에서 버스를 먼저 탈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반드시 승차 위치에 서야 한다. 는 신뢰가 있기 때문에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해 보이는 버스 정거장 한 줄 서기가 오히려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줄에서 빠져나와 내가 타려는 버스를 탈 때 누구도 서두르지 않습니다. 줄에서 뒤늦게 빠져나와도 먼저 타려던 앞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이 기다려 주었습니다. 물론 그 아저씨가 특별히 배려심이 넘쳐 흘러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버스 정거장 한 줄 서기를 하지 않는 것은 버스를 믿을 수 없고, 옆 사람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운에 맡기는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눈치껏 상황 파악을 해서 적당한 자리에 서서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이 버스에 먼저 탈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노오력’ 이라고 합니다.
신뢰
물론 이런 단편적인 사실들로 하여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일본 사람들은 서로를 신뢰한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총기 규제와 관련해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신뢰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합니다. 미국의 경우 ‘네가 총을 가지니 나도 총을 가지겠다.’는 불신 프로세스로 총기 소지에 대한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의 경우 ‘내가 총을 가지지 않을테니 너도 총을 가지지 말아라.’는 신뢰 프로세스로 총기 소지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물론 무기 산업의 규모와 로비를 포함한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우리가 길을 걸으며 ‘저 사람이 총을 가지고 날 쏠지도 몰라' 하는 생각은 하지 않으니까 적어도 상대방이 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정도는 믿고 살 수 있으니까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통해 통일을 이루겠다고 선언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선언을 했었다는 사실도 잊었을 것 같은데, 신뢰의 사전적 의미는 알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서로 간의 신뢰는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 듯 보이는 제도도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일본 버스 정거장을 보고 배웠습니다. 다음에는 일본 버스 2탄으로 버스 내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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