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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박타박 세계일주 3 :: 낯설지만 낯익은 알마티, 카자흐스탄 본문
범법자보다는 계약직 노동자
부족한 문장으로 써 내려 간 여행기를 읽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언론과 포털의 힘이 어떤 것인지 피부로 느끼고 나니 새삼스럽다. 내 글은 대중에게 공개되기도 했지만, 대중보다 더 마음이 쓰이는 곳은 학교에서 같이 공부했던 제자들이다. 지난번 글을 쓴 후, 실업 급여 부정 수급을 지적하는 분들이 많았다. 본인의 의지로 인한 퇴사는 실업급여 신청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사실과 다르기에 그러려니 지나가려 했지만, 역시나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범법자보다는 당당한 계약직 노동자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지난 5년간 기간제 교사였다. 5년 동안 5번의 계약을 하였으며, 나의 퇴직 사유는 '계약 기간 만료에 의한 해직'으로 사업주가 해직을 인정하였고 공단에서 서류 심사를 거쳐 승인되었다. 5년간 실업 급여를 납부했으며 지난 2개월간 실업교육을 받고 규정된 구직활동을 하였다. 해외에서는 구직 활동을 인정받을 수 없으므로 남은 실업급여는 자동 소멸할 예정이다. 따라서 나의 경우는 실업 급여 부정 수급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만약 이후에도 문제가 된다면 당연히 부정으로 수급한 급여는 국고로 환급하여야 한다.
아이들에게 평등과 차별 그리고 차별과 차이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지위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모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첫 번째 글을 쓰면서도 그러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 싫지만, 차이를 두고 차별을 하면 안 된다고 말은 했지만, 내가 먼저 차이의 틀 속에 나를 가두고 막연한 불안과 알량한 자존감으로 스스로를 차별하고 있었다. 오늘 이 글로 인하여 마지막 짐도 내려놓은 것 같다. 아이들에게 대답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다. "선생님, 다시 학교로 올 거죠?"
낯설지만 낯익은 알마티(Almaty)
알마티 상공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곧 착륙한다는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오자마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심하게 요동친다. 날개가 보이는 창가에 앉은 덕분에 휘청거리는 요동치는 날씨와 그에 맞춰 흔들리는 날개 끝이 더욱 마음을 졸여온다. 당황한 승객들은 웅성거리지도 못할 정도로 긴장한 채 착륙을 기다린다. 그리고 비행기는 승객들의 두려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활주로에 사뿐히 착륙한다. 사람들이 가벼운 환호와 박수를 친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모든 교통수단 중 가장 안전하다는 비행기이지만, 모든 교통수단 중 가장 무서운 것도 비행기다.
알마티는 터키행 비행기 중 가장 저렴한 항공이 이곳을 경유했기 때문에 방문하게 되었다. 카자흐스탄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어떤 것이 유명한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왔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한글 가이드북은 당연히 구할 수 없었고, 구체적인 정보를 찾기도 어려웠다. 심지어 구글 지도는 러시아어로 지명을 표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호기심이 알마티에서 스톱오버를 5일간 하게 했다. 중앙아시아 지역 중에서 유일하게 무비자 방문국가라는 점도 체류를 결심하게 된 큰 이유이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입으로 발음을 해 보는 것만으로 낯섦이 묻어났다.
인터넷으로 예약해 둔 숙소에 픽업 서비스를 신청해 둔 상태였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이동하는 대중교통은 없다고 했다. 택시는 미터기를 사용하지 않고 흥정을 통해 차비를 낸다. 그나마도 영업용 차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가용을 이용하여 택시 영업을 하고 있어서 사전 정보가 없이 택시를 덜컥 타는 것은 두려웠다. 숙소에서 마중 나온 '알레크' 아저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도심으로 가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알마티의 풍경은 낯설지만 낯익었다. 일본 회사에서 만든 차였지만 운전석은 좌측에 있었고, 차량은 우측통행을 했다. 그리고 도로를 달리는 차량 중 절반이 우리나라에서 만든 차들이었다. 길가에 다니는 사람들도 그냥 보면 한국인 같았다. 실제로 카자흐스탄에는 고려인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아저씨가 틀어 놓은 팝과 트로트를 섞은 듯한 음악은 낯설었다.
그들의 이야기 또는 우리의 이야기
알레크 아저씨가 나에게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반색을 한다. 그리고 자기는 고려인이라고 했다. 그제야 아저씨 얼굴을 보니 그냥 한국인이었다. 한국인이 독특한 억양으로 영어를 말하고 있었다. 아저씨의 할아버지 성함은 '호순철', 아버지 성함은 '호민철'이라고 했다. 물론 러시아 억양이 가득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한국인을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를 하니 자기는 한국인이 아니라 '고려인'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를 했다. 할아버지 때 이곳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단다.
할아버지께서 이주하신 게 혹시 1930년대 아니냐고 물어보니 깜짝 놀라신다. 1938년이라고 했다. 1938년은 간도 대이주가 거의 마무리 단계였지 않냐고 아는 척을 했다. 한국에서 한국어와 역사를 전공했다고, 그때의 일은 참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간도 문제는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우리가 풀어야 할 우리의 문제다. 갑자기 궁금한 것들이 많이 생겼다. 덕분에 교통 체증으로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나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고려인'이라는 것을 항상 자각하고 있냐고 하니 '나는 고려인 후손이지만 카자흐스탄에 사는 소비에트 사람이다.'라고 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에도 당시 연방에 살던 사람들은 소비에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런가 보다. 카자흐스탄 사람을 지칭하는 '카잔'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이후 숙소에서 만난 할머니는 자신을 '카잔'이라고 소개했었는데, 다민족 국가이면서 복잡한 근대사를 겪은 나라여서 그런지 그들의 마음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일단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준비 없이 왔다는 것은 러시아어로 인사와 숫자 같은 기본적인 표현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의 공식 언어는 러시아어이다. 카자흐스탄어가 있지만, 공용어가 아니란다. 문득, 일본강점기 민족말살정책이 그대로 이어져 한국어가 우리나라 공식 언어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한국인이 아니라 고려인이라는 이야기를 문장이 아니라 실제 음성으로 들으니 그 울림이 컸다. 이것은 그들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차는 숙소에 도착하였고 아저씨는 또 다른 일이 있는지 차를 타고 갔다. 그리고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숙소 스텝과 손짓 발짓을 동원하고 구글 번역기까지 가져다가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한 사실을 확인하고 배정된 방으로 갔다. 고위도라 그런지 밤 9시가 되었지만 사위는 희끄무레하였고, 시차는 겨우 3시간이었지만 나는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알마티는 화창하게 갠 하늘 아래 환상적인 풍광을 펼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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