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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박타박 아홉걸음
타박타박 세계일주 5 :: 숨은 듯이 여행했던 알마티의 마지막 본문
들이받고 또 들이받아 봐도 지치지 않는 나의 엔진에 더 큰 용기를
들이받고 받아도 사라지지 않는 나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 데이 브레이크, '범버카' 중에서
아침부터 노래를 흥얼거리던 노래가 종일 입에 붙어 있다. 한국에 있는 동안 늘 꿈꾸었던 작은 소망이 평일 낮에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 앉아 햇볕 아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물론 한 번도 못 해본 건 아니다. 학교에 있었으니까 방학 기간이라도 되어야 일 년에 한두 번 가능한 일이다. 보통 교사들이 모두 방학이 엄청 길고 내내 집에서 쉴 것 같지만, 나 같은 경우는 여름과 겨울 방학 기간에 주말 제외하면 정말 방학이라서 출근을 안 한 날은 2~3일 정도였던 것 같다. 5년간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연가라는 것을 단 하루도 써 본 적이 없으니까 평일 낮에 펼쳐지는 한량 짓은 나의 소망이라고 할 만했다. 팽팽했던 실이 끊어지는 현실을 탁하고 놓아버리니 낯선 이국땅에서 나는 호기롭게 한량 짓을 하고 있다. 오늘은 어디를 가볼까?
알마티 여행에 대해서 검색하면 누구든 1순위로 메데우(Medeu)를 꼽는다. 나는 메데우가 산 이름인지 호수 이름인지도 모른 채 그저 좋다는 이야기만 기억하고 있었다. 지명이 대부분 러시아어로 되어 있고, 러시아어는 알파벳과 생김새와 발음 모두 비슷하지 않아서 어떤 정보든지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처음 한동안은 왜 이 나라에는 영어가 없냐며 투덜거렸지만, 많은 소수 민족으로 이루어진 카자흐스탄에서 자기 민족 언어와 러시아어와 카자흐스탄어에 더불어 영어까지 쓴다면 학생들은 종일 국어와 외국어만 배워야 할 것이라 생각하니 쉽게 납득이 됐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사고가 늘 학교와 아이들에게 맞춰져 있다.
결국, 직접 찾은 메데우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빙상 경기장인 메데우 스타디움(Medeu Stadium)을 이르는 말이었다. 메데우('미도우'라고 발음하는 것 같기도 하다)가 지명인지 다른 고유 명사인지는 모르겠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알마티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고 하여, 이제는 단골이 된 카페를 찾아가 맛있는 커피와 함께 관광 코스를 주문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오더니, 여기서 걸어가서 알마티 호텔 앞에서 29번이나 6번을 타면 메데우 방향으로 간다고 했다. 매일 출근하듯 찾아가 300탱게(1000원)짜리 에스프레소와 350탱게(12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인터넷을 실컷 했던 Cafe NEDELKA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많이 생각날 것 같다. 감도는 커피는 언제나 신선했다. 그리고 직원들은 친절했다. 다만.. 버스 번호를 틀리게 가르쳐주었을 뿐이다.
29번 버스를 타기 위해서 알마티 호텔 앞 정거장으로 갔다. 정거장에 정차 버스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자전거와 함께 서 있는 잘생긴 청년에게 29번 버스를 여기서 타면 되냐고 물었다. 영어를 못 한단다. 아이고 이런. 그리고 연신 미안하다고 하더니 잠깐만 기다리란다. 스마트폰의 번역기를 꺼내 들고 대화를 시작했다. 결론은 여기가 아니라며 다른 정거장으로 가라고 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나도 분명히 정거장을 확인하고 왔고, 확인차 물어본 것인데 너무 먼 곳을 알려준다. 갸우뚱하고 서 있으니 어디 갈 거냐고 묻는다. "메데우~!" 라고 했더니 반색을 하며 자기도 거기 간다며 12번 버스를 타야 한다고 했다. 현지인 카페 종업원이 29번이라고 했는데... 혼란스럽다. 이 사람을 믿어야 하나? 이러다 큰일 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하고 있는데 29번이 왔다. 타지 말란다. 부처님 같은 얼굴을 하고서 예수님 같은 미소로 이야기하니 차마 탈 수가 없었다. 29번을 보내고 나니 이 친구가 물 있냐고 묻는다. 없다고 했더니 버스 정거장에 딸린 가게로 들어가 1리터 생수를 사와서 나에게 내민다. 응? 이게 뭐지? 신종 사기수법인가? 하며 혼자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데 이 친구가 나에게 "메데우에 가면 목이 마를거야." 라고 이야기 한다. 돈으로 환산하면 400원짜리 친절이었고, 나에게는 알마티 아니 카자흐스탄인 전체가 베푸는 호의였으므로 국가대표급 친절이었다.
참 잘생긴 이 청년의 이름은 안톤. 러시아 대 문호 안톤 체 호프를 떠올리며 이름을 기억했다. 알마티에 오는 여행객 그것도 조그만 동양인이 그들에겐 낯선가보다. 알마티는 널리 알려진 여행지가 아니다. 아마 카자흐스탄 전체가 그렇지 않을까. 알마티에 있는 동안 재래시장 갔을 때를 제외하면 관광객을 상대로든 현지인을 상대로든 호객행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낯선 동양인을 향해 흔히 던지는 차이니즈? 저패니즈? 하는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어느 여행기에서 읽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면 숨은 듯이 다닐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조용히 여행할 곳을 찾아 떠났는데, 누구도 자신을 향해 관심을 보이지 않아 오히려 섭섭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알마티에서 지내는 동안 딱 그랬다.
안톤의 호의는 충분히 나를 감동시켰고, 한국에서 외국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돌아보며 반성하게 했다. 알마티 사람들은 내가 스마트폰 지도를 들고 가만히 서 있으면 어디를 찾냐며 먼저 말을 걸어 왔다. 그리고 러시아어로 설명을 해준다. 손가락만 있으면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고, 나는 알아들을 수 있다. 영어를 할 줄 몰라도 된다. 나는 외면했었다. 손에 쥔 비싼 스마트폰은 자판을 치지 않고 말을 하기만 하면 자동으로 전세계 언어를 번역을 해준다. 성의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관광객이 많은 해운대 지역에 살다보니 내가 충분히 도울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돌아가면 조금 더 여유로워지고 너그러워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잊지 말자고 다짐한다.
안톤은 자전거를 들고 버스에 올랐다. 자전거 운반비용까지 추가로 내는 것 같았다. 자전거를 들고 어디를 가는걸까? 집이 산에 있나? 단어로만 이루어진 짧은 대화를 주고 받는 동안 버스는 메도우에 도착했다. 안톤과는 작별이다. 기념 사진도 찍고, 인스타그램 계정도 주고 받았다. 안톤은 여기서부터 시내로 다운힐을 한단다. 한국에 있는 내 자전거가 보고 싶어졌다. 지난 여름에 짧은 방학을 이용하여 제주도를 자전거로 한 바퀴 일주했었는데 그때의 이야기를 안톤에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당연히 포기하고 나도 자전거를 정말 좋아한다는 말로 대신했다.
“나는 너를 기억할게. 너도 나를 꼭 기억해줘.”
안톤의 짧은 문장이 마음에 닿는다. 이 글이 마무리 되면 얼른 안톤에게 보내주고 러시아어를 하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꼭 전해야겠다.
”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당신의 호의에 나는 정말 감동 받았어. 너 때문에 앞으로는 마음이 조금은 더 너그러워질 것 같아. 고마웠어. 안톤.”
메도우 스타디움이 한눈에 보인다. 와우.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빙상 경기장이다. 현재 알마티는 대규모 국제행사들을 준비중이다. 2017년 동계 유니버스아드 대회와 청정에너지를 주제로 한 만국박람회가 그것이다. 경기장들을 대대적으로 보수중이었다. 야외 빙상 경기장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데, 무려 해발 2000미터 산속에 있는 빙상 경기장을 보게 되다니. 관중석에서 경기장을 내려다보니 괜히 설렜다. 출발을 알리는 총성과 사람들의 환호가 포개져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게 했다.
지금부터는 심블락 Shymblack (현지인들은 '침블락'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스키장까지 등산이다. 스타디움 뒤편으로 메데우 댐이 있고 댐을 넘어 올라가면 스키장까지 아스팔트 포장길이 이어져 있다. 일단은 댐을 오른다. 곧게 뻗은 직선 계단이다. 기분 좋게 타박타박 아홉걸음... 도저히 못 가겠다. 끝이 없다. 계단 끝에 하늘이 보여 올라가면,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하는 환청이 들렸다. 그리고 다시 끝없는 계단이 하늘까지 닿아 있다. 계단을 천 개는 밟은 것 같다. 계단 하나에 비난과 걸음 하나에 비속어를 섞으며 올라간다. 조그만 아기들이 나보다 빨리 씩씩하게 올라 간다. 속상하다.
계단 끝까지 올라가니 일레 알라타우 국립공원(Ile-Alatau National Park)의 설산이 펼쳐져 있다. 아.... 다른 말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지 모르겠다. 나의 어휘력과 표현력에 첫 번째 문제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인간 언어의 표현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형편 없는 지 깨닫는다. 저걸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냥 '아....' 말고는 모르겠다. 감탄사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다. 등산로 같은 포장도로를 타박타박 걷는다. 고도계는 계속 숫자를 바꿔가며 내가 얼마나 높이 있는 지 알려 준다. '힘내. 일단 백두산 천지연이 너의 발 아래에 있어.' 공기가 맑다는 것을 코 보다 폐가 먼저 느낀다. ‘해발 2200미터라... 혹시 고산증상이 오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백두산 등반 기사에서 등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고산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네팔에서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했을 때에도 같이 올라 갔던 셰르파가 3200미터 푼힐을 가기 전에도 고산병에 대한 주의를 엄청 많이 주었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겨우 2200미터로 고산 증상 같은 게 오지는 않나보다. 또는 내가 운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럴리가 없는데.
심블락 스키장에 도착했다. 스키 슬로프와 베이스캠프, 아주 긴 리프트가 보인다. 리프트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슬로프 시작이 어디일까? 스키장 안내도를 보니 가장 높은 슬로프는 해발 3300미터에서 출발한단다. 3300미터라... 이제는 히말라야와 비교해야하는구나. 뒷산 봉우리는 5천미터, 높은 곳은 7천미터라고 하니 그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압도 당한다. 나는 참 작구나. 심블락 스키장은 인공눈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개장과 폐장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고 눈이 내리면 운영하고 눈이 녹기 시작하면 운영을 멈춘다고 한다. 5월 중순에 도착하니 뙤약볕이 내려쬐는 날씨에도 슬로프의 절반 정도는 눈으로 덮여 있었다. 일반적으로 4월까지는 운영을 한단다.
슬로프 운영 기간 중에는 오전 10시 오픈하여 월요일부터 격일로 오후 6시와 밤 11시까지 리프트를 가동한다. 장비 풀셋을 빌리는 데는 일일 5천 텐게(15000원)이다. 스위스 알스프 스키장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곳 심블락 스키장이 세계 어느 유수의 스키장과 비교하여도 결코 모자라지 않을 것 같다. 언젠가 또 기회가 된다면 꼭 심블락 스키장에서 스노보드를 타보고 싶다. 물론 스키를 타지 않더라도 해발 3300미터의 슬로프가 있는 스키장 자체가 큰 볼거리다.
알마티 시내에서 12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메데우까지 이동한 후 심블락 스키장까지 가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다. 일반적으로는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심블락까지 이동한다. 내가 갔을 때에는 케이블카를 수리 중이라 탈 수가 없었다. 가격은 왕복 3천 텐게(15000원)였다. 이 케이블카를 타고 심블락에 가는 동안 보이는 풍경이 그렇게 기가 막히다는데 내게는 그런 행운이 없었다. 착하게 살아야겠다. 나처럼 도보로 심블락까지는 간다면 메데우에서부터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며 눈앞에 펼쳐진 병풍 같은 산자락을 보며 걷는 재미가 있지만, 워낙 경사진 길이라 힘들다.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택시는 보통 편도 2천 텐게(6000원)을 받는다. 하지만, 택시 회사에서 정해놓은 가격은 2800텐게다. 모든 택시는 흥정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가격을 물어보고 2천 텐게라는 확답을 받고 택시를 타자. 안 그러면 올라갈 때는 2천 텐게, 내려올 때는 정가대로 2800텐게를 내게 된다. 마지막으로 셔틀버스가 있다. 차 옆에 크게 심블락-메데우 에코 버스라고 쓰여 있다. 30분에 한 번씩 운행하는데, 실제 배차 간격은 그것보다 짧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셔틀버스는 무료다. 셔틀버스가 있다는 것도, 심지어 무료라는 것도 스키장에서 택시를 타고 내려와서야 알게 되었다. 셔틀버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오장육부가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것 같다. 배낭여행객에게 심블락 택시비는 큰 지출이다.
시내 지리도 조금 익숙해졌고, 타박타박 걸어서 카자흐스탄 국립중앙박물관(Central State Museum of the Republic of Kazakhstan)으로 향한다. 공화국 광장 근처라 찾기도 쉽다. 평일 아침인데도 사람이 많다. 어린 학생들은 단체여행을 온 것 같고, 노부부의 모습도 많이 보였다. 와글와글 북적거리는 곳에는 중국인 단체관광객이 있었다. 여기서도 영어로 된 팸플릿을 찾기가 어려웠다. 안내대에 계신 분도 영어를 못하신다. 요청하고 한참을 기다리니 다른 직원분이 오셔서 A4 한 장으로 된 간단한 팸플릿을 주신다. 영어로 된 박물관 안내책자는 돈을 내고 구매해야 한다고 해서 한 권 사서 박물관 관람을 시작한다. 유물에 관한 설명도 대부분 러시아어로 되어 있어 어버버하며 그냥 훑는다. 드문드문 영어로 정리된 안내문이 있었지만, 고고학 관련 학술용어들이 등장하여 읽기가 버겁다. 그렇다고 유물들이 낯선 것들은 아니어서 훑으며 지나간다. 1층은 선사시대부터 고대까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맘모스 화석을 발굴하여 실제 크기로 복원해 놓았는데 그 크기가 족히 3m는 넘는 것 같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을 언젠가 가봐야지 하다가 결국 아직도 못 가봤는데, 거기 갔다가 왔다면 알아보기가 훨씬 편했을 것 같은데 아쉽다. 2층은 유목문화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었다. 다양한 일상용품들이 있었고, 유목민들이 짓고 살았던 주택도 전시되어 있다. 박물과의 규모도 크지 않고, 특별히 흥미로운 것들도 없었다. 아는 것이 없으니 보이는 것도 없었다. 카자흐스탄 역사에 대해 무지한 나의 문제였다. 또 하나,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 얼마나 훌륭한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유물 전시는 조명 기술이 아주 중요하다. 해당 유물에 어울리는 직간접 조명을 어떻게 비추느냐에 따라 유물을 보는 감흥이 달라진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문화재 관리 부분에서 늘 대중과 언론의 몰매를 맞고 있는 문화재청이 실은 얼마나 최선을 다해 문화재를 관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다만 3층에 있는 다민족 문화실은 매우 흥미로웠다. 수많은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여서 필요한 전시실인 것 같았다. 전시실 한쪽에는 한국관도 마련되어 있었다. 2003년 양국교류 활성화를 기념하며 국립민속박물관 측에서 문화재를 기부한 것으로 보인다. 겨우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한글을 보니 그저 반갑다. 읽을 수 있는 글자들은 다 읽어 본다. 반대편 입구에는 체르노빌 사건 당시의 사진과 용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체르노빌은 카자흐스탄이 아닌 우즈베키스탄에 있으나 사건 당시는 한 국가였으니 모두에게 아픈 기억일 것이다. 체르노빌은 현재까지도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이고 당시 주민들은 여전히 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박물관은 ‘기억’을 위한 공간이다. 어쩌면 외면하고 싶은 기억일 수도 있을 텐데,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지금 내 왼손에 차고 있는 노란 팔찌에는 ‘REMEMBER 20140416’ 이란 문구가 새겨져있다. 우리반 아이들 중에도 여전히 교복에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 세월호 사고는 아직 정확한 경위도 밝혀지지 않았고, 배는 여전히 수습되지 않은 희생자들과 함께 바닷속에 잠겨 있다. 사고가 수습이 되고 나면 우리 사회는 이 날을 기억할까. ‘잊지 않겠습니다. 꼭 기억하겠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어쩌면 그날 그 배에 타고 있지 않았다는 반증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살아있었다면 그들 중 누군가를 공화국 광장에서 만나 “한국에서 오셨어요?” 라며 서로 반갑게 인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내가 힘들 때 누구도 나의 손을 잡아 주지 않을 것이다.
알마티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직교형 도시 구조로 되어 있으면서 모든 좌회전을 비보호로 한다는 것이었다. 도시 전체의 도로가 직교형이라 왕복 10차로든 기본이었다. 그런 도로를 교차로에서 모두가 비보호 좌회전을 했다. 처음에는 교차로 꼬리물기가 참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유심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직진을 기다리는 차는 정지선을 지키며 정확하게 서 있었고, 좌회전하려는 차량은 교차로에서 직진 신호가 들어왔을 때 반대편 차량을 확인하고 눈치껏 좌회전을 해야 했다. 앞차가 조금만 뭉기적거리면 여지없이 경적이 울렸다. 알마티 근교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 승용차를 빌릴까 싶었는데, 깔끔하게 포기했다. 왜 좌회전 신호를 만들지 않은 걸까? 모든 도로에는 신호등이 빨간색, 노란색, 녹색 세 가지로만 되어 있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나의 궁금증을 풀 수는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차량이 난폭운전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건널목에 녹색불이 들어와도 차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지나가긴 했지만, 신호가 없는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사람이 있어도 모두가 여유 넘치게 기다려 주었다. 그래서인지 건널목에서 빨간불이 들어와 있어도 사람들은 그냥 지나갔다. 심지어 유모차를 몰고 가는 아기 엄마도 있었다. 대단하다. 운전자를 믿는 것이겠지.
낯선 이방인으로 알마티에 일주일 가까이 머물면서 한 번도 '이 길은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싶은 기억은 없었다. 인구밀도가 낮은 편이라 거리 대부분이 한산한 편이고, 밤이 되면 우리나라 같은 빛 공해가 없어서 거리가 어두운데도 치안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숙소에서도 밤늦게 돌아오는 손님들이 많았다. 아마도 일몰 시간이 늦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알마티 전체가 안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길가에 있는 ATM을 보고 놀랐는데, 아무런 보안장치 없이 덩그러니 ATM 기기들이 외부에 노출되어 있었다. 하다못해 유리문 하나 없었다. 한밤중에 강도들이 털어가면 어떡하려고 저렇게 덩그러니 두나 싶었는데, 모르긴 해도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나 보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ATM기기는 은행 보안시설 속에 있고, 사설 ATM 기기도 24시 편의점 내에 있는 것이 보통이다. 거리에 특별히 경찰이 많거나 하지는 않았다. 성급한 일반화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알마티는 늦은 밤 산책을 다녀도 마음 놓아도 되는 곳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늦은 시간에 다닐 필요는 없다. 어느 곳이든 해가 지면 외출을 자제하는 것이 안전한 여행의 지름길이다.
알마티에서 남은 시간동안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재래시장인 그린 마켓(Green Market)을 다녀왔고, 현지인들이 자주 찾는다던 휴양지였지만 날씨 때문인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던 시란호수(Siran Reservoir)와 조그만 마을 축제도 구경했다. 길가에서는 교복을 멋지게 차려 입은 초등학생들이 박물관에서 보았던, 심지어 ‘만지지 마세요’ 라고 써 있던, 공기놀이 같은 돌을 가지고 놀고 있어서 깜짝 놀라게 했다.
이스탄불로 떠나기 위해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알레크 아저씨에게 픽업 요청을 하니 공항으로 갈 때는 택시를 불러서 타고 가란다. 자기가 태워주면 2800 텐게지만 택시를 타면 1200 텐게라며 콜택시에 전화했고, 결국 알레크 아저씨 덕분에 1170 텐게에 공항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알레크 아저씨 덕분에도 마지막 남은 대중교통인 자가용 택시도 경험할 수 있었다. 호의였는지 귀찮았던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기분 좋게 내 마음대로 알레크 아저씨의 호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알마티 국제공항이 생각보다 규모가 작아서 놀라고, 내국인에겐 꼼꼼하게 하던 수하물 검사를 나에게는 제대로 하지 않고 들여보내서 놀라고, 마이그레이션에서는 마이그레이션 카드를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조금 곤란해 하다가 쿨하게 그냥 가라고 해서 놀랐다. 비행기에서 보니 카드는 내 지갑 속에서 고이 접어 나빌레라.
“아이고 아저씨 제가 이래요. 미안해요. 마지막까지 고마웠어요. 알마티. 언제든 기회가 생기면 망설이지 않고 날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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