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박타박 아홉걸음

타박타박 세계일주 6:: 여행자 정신을 일깨워 준 이스탄불 본문

여행

타박타박 세계일주 6:: 여행자 정신을 일깨워 준 이스탄불

한성은 2016. 5. 30. 19:34

또 다른 길을 가고 싶어

내 속에 다른 날 찾아 

저 세상의 끝엔 뭐가 있는지

더 멀리 오를 거야 

아무도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진 않아

-임상아, '뮤지컬' 가사 중에서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곧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 착륙합니다. 땡큐."


<낯선 이국땅에서 반갑게 만난 내 이름 석 자>

 

기장의 안내방송에 잠에서 깨어나 비행기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이스탄불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저 아래에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들이 뛰어다니고 있는 건가. 그리고 창가에 물방울들이 있다. 비가 오나? 뭔가 익숙한 장면이다 싶었는데 역시나 착륙을 하기 위해 하강하던 비행기가 요동을 친다. 위, 간, 폐, 소장, 대장, 십이지장이 모두 중력의 영향을 벗어나 자유롭게 떠다닌다. 나는 이 느낌이 너무 싫어서 바이킹도, 롤러코스터도 타지 않는다. 내 꿈이 파일럿이 아니었던 게 천만다행이다. 그리고 비행기는 언제나처럼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심하게 착륙을 한다. 얄밉다. 알마티에서도 그랬고 이스탄불까지 도착하는 도시마다 공항에서 비가 내린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나는 우사와 풍백을 데리고 다니는 환웅인가. 한국은 폭염 주의보라던데 메마른 대지를 적시러 가야겠다. (이후로도 도시를 이동할 때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다.) 아이고 머리야. 당분간은 메이저 항공사를 이용할 계획도, 예산도 없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먹고 마시기를 실컷 하고 잤더니 무려 숙취가 느껴진다. 과유불급이라. 간단한 입국 심사를 마치고 나오니 누군가 내 이름을 써서 들고 있다. 숙소에 예약해 둔 픽업 서비스였지만, 낯선 이국땅에서 내 이름이 적힌 손팻말은 반가웠고, 안심이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지역을 이동한다면 반드시 숙소를 예약하고 픽업 서비스를 신청할 것'


여행 경비를 아껴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전하게 여행을 마무리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세워둔 원칙이었다. 이스탄불에서는 마침 원룸형 아파트가 저렴하게 나온 게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3일을 예약해 두었었다. 호스트 이름이 Saban이라 피켓을 들고 있던 청년에게 "네가 싸반이야? 안녕!" 했더니 자기는 사반이 아니고 사반은 자기 보스라고 했다. '아.. 기업형으로 운영하는 호스트였구나. 뭐 어때 저렴하기만 하면 되지.' 공항 밖으로 나가니 한국전쟁 중 영도다리 밑에서 이산가족을 찾는 것 같은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손님을 태우려 기다리는 차들과 기다리는 차에 타려는 여행객, 손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택시 기사의 외침, 그리고 일정한 박자를 반복하며 무언가를 외치는 호객꾼들의 소리에다가 추적추적 내리는 비까지 더해지니 정신이 혼미했다. 픽업 서비스를 신청하길 잘했다. 나를 기다리던 승합차에 올라탔다. 기사분이 반갑게 맞아주고 짐도 실어 준다. "안녕 싸반!" 했더니 역시나 자기는 사반이 아니고 사반은 자기 보스라고 했다. 음... 사반을 찾아라. 인사라도 해보자.


사실 인터넷으로 숙소를 예약하면서 픽업 서비스를 신청했는데 25유로를 달라고 해서 반쯤은 포기한 상태로 너무 비싸서 못 타겠다고 깎아 달라고 메일을 보냈었다. 물론 안된다고 하면 마음속으로 맹비난을 좀 하고 그대로 예약을 진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웬걸, '문제 없어(No problem)'이라고 답장이 왔다. 터키 여행은 터키행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카자흐스탄에서 지내는 동안 제대로 된 흥정이란 걸 할 일이 없었다. 딱 한 번 택시를 탈 때 "얼마에요?" 라고 물어본 정도가 전부였다. 조그만 구멍가게에서도 모든 제품에 손글씨로 물건값이 써 있었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어디든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 관광지로 가는구나. 정신 차려야지~! 라고 다짐했으나, 물론 첫날부터 다짐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숙소에 밤늦게 도착한 탓이기도 하지만, 좁고 어두운 골목에 드문드문 불을 밝힌 가게들이 낯설어서 도착한 날에는 조용히 숙소에서 짐 정리만 했다. 스스로 세워둔 두 번째 원칙이 있다.  '도시를 이동한 첫날에는 가능하면 돈을 쓰지 말 것'. 결국 여행객과 관련한 사고 대부분은 돈과 관련되어 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다니며 생길 수 있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나름의 원칙이었다. 침대에 누웠는데

'아~ 아아~'하는 기도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자미에서 스피커를 통해 기도 소리였다. 공기 속에 섞여 있는 낯선 냄새와 을씨년스럽게 들리는 낯선 기도 소리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곧 익숙해지겠지. 그래야만 한다. 찬란한 이슬람 문화를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느끼고 싶다.'


새벽부터 온 동네를 깨우는 기도 소리에 잠이 깼다. 이 소리가 어느새 익숙해졌나 보다. "인제 그만 일어나~ 게으른 한량 여행객이여~" 하는 소리로 들린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밖으로 나간다. 이스탄불 최대의 재래시장이라는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로 향한다. 독실한 종교인들은 아침잠이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숙소 주변 가게들이 문을 열지 않았다. 아! 일요일이었구나... 요일이 어떻게 바뀌는 지도 모르고 다니고 있다. 무슬림들은 일요일(성스러운 금요일)을 매주 잘 지키기 때문에 가게들도 대부분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서양력으로 금요일인지 일요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세계 3대 종교인데 참 모르는 것이 많다. 아니, 아는 것이 없다. 미디어에서는 언제나 잔혹한 면만을 부각하여 보여주니 히잡과 차도르는 그저 공포의 상징으로만 다가온다. 여행 전에 읽었던 터키 관련 서적에서 터키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다른 무슬림 국가들 보다 조금 개방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낯섦에 대한 설렘을 안고 길을 나선다.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 썰렁한 이스탄불 구시가 지역>


일요일이지만, 그랜드 바자르 근처는 이미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 그리고 관광객으로 인산인해였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상인들이 나를 향해 소리 친다. "차이니즈, 재패니즈, 니하오, 오하이오"에다가 간간히 "안녕하세요"까지 외쳐대고 일명 터키 아이스크림이라 불리는 간식을 파는 청년은 아예 내 옷깃을 잡아 세운다. 관광객이 관광지에서 당연히 겪어야 할 장면인데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겨우 일주일이었지만, 카자흐스탄이 그리워졌다. 한국이 아니라 카자흐스탄이 그립다니. 우습다.


목표는 시장 안에서 끼니를 때우는 것이었는데 안 되겠다. 일단 밥을 먹고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 싶어 도로변에 있던 식당으로 들어간다. 터키 음식을 파는 뷔페식 식당이었는데, 일정 금액을 내고 마음껏 먹는 것이 아니라 접시에 내가 원하는 음식을 이것저것 담고 계산을 한 후 자리에서 먹는 방식이었다. 이후로도 뷔페라 적힌 가게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나는 몹시 허기져있었고 가게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는 한국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요리사에게 "나 터키 전통 음식 먹어보고 싶어. 어떤 게 좋을까?" 했더니 닭볶음탕, 피망찜, 훈제치킨, 쌀밥, 볶음밥 등을 조금씩 담아 준다. 그리고 접시 위에 고로케 튀김 같은 것도 한 개 얹어 준다. "땡큐~"를 연발하며 접시 가득 담아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헉!! 너무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접시 위에 쌀 한 톨, 상추 한 조각 모두 계산서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도 조금 먹어볼래?" 라는 말을 나는 호의로 생각하며 연신 "땡큐"를 외쳤다. 내가 손가락으로 선택한 음식은 두 가지였고 그중 하나는 하얀 쌀밥이었기 때문에 조금씩 담긴 나머지 음식은 '요리사가 가난한 여행자에게 호의를 베푸는구나'라며 혼자 커다란 오해를 한 것이었다. 얼척('어처구니'의 경상도 방언)이 없었다. 계산을 하고 테이블에 앉았는데, 환율(1리라=400원)을 곱해보니 손이 떨렸다. 천사가 위로해 준다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위로는 됐고 그냥 10분 전으로 되돌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에쿠니 가오리가 쓴 작품집 제목이 떠오른다.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자신을 터키 최고의 요리사라 소개한 아저씨와 내 지갑을 텅 비우며 위 속으로 빨려 들어간 음식들>


옆에 놓인 메뉴판을 보니 나에게 특별히 사기를 친 것도 아니었고, 모든 상행위는 원칙과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게 더 억울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지만, 원망의 대상은 오직 나 자신뿐이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접시 위에 음식들이 하나같이 너무 맛있다는 것이다. 비싸서도 아니었고, 배가 고파서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 접시까지 다 먹을 기세로 퍼먹었는데, 먹다보니 배가 부르다. 더이상 먹을 수가 없다. 배가 고픈 나머지 내 위장의 크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접시 위에 탐욕을 듬뿍 쌓아 올린 것이었다. "오라질 년!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 이번엔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한 끼 식사 속에서 희로애락과 새옹지마를 다 겪고 나오니, 나는 조금 늙어버린 것 같다.


바자르고 뭐고 모든 게 미워졌다. 아.. 맛있게 먹었으면 됐지 뭐. 사실 이렇게 호들갑을 떨지만, 한국에서라면 퇴근 후 혼자 국밥집에서 소주 한 병 마시는 것과 다르지 않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돈을 벌면서 쓰는 처지였었고 지금은 그저 가진 돈을 축내며 다니는 처지ㅈ다. 그리고 통장 잔고는 남은 여행 기간과 오차 없이 정비례했다. 마음을 비우자. 이스탄불의 상징, 블루 모스크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술탄 아흐멧 자미(Sultan Ahmet Camii)로 향한다. 가서 알라신께 속상함을 털어놔야겠다. 타박타박 아홉걸음.


자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집트에서 가지고 오다가 아랫 부분을 깨 먹어서 2/3 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대한 오벨리스크였다. 싸우고 정복하고 뺏고 빼앗기고 하는 것이 인간사의 반복인 것 같다. 나를 포함한 관광객들은 오벨리스크를 온전하게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바닥에 들러붙어서 사진을 찍어댔다. 약탈당한 우리 문화재들도 영국과 프랑스 박물관에서 티켓 장사에 이용되고 있겠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 더 화가 날 것 같다.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탐하는 인간의 욕망이 오벨리스크에 투영된 것 같다.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거대한 오벨리스크. 운반 중 파손되어 실제 크기의 2/3 정도밖에 안 된다>


술탄 아흐멧 자미는 무슬림 입구와 관광객 입구가 따로 있다. 내부도 기도하는 장소와 관광객들을 위한 장소가 분리되어 있다. 자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옷차림을 단정하게 해야 한다. 들어가는 입구에서 복장이 불량한(?) 관광객들을 위해서 무료로 히잡과 치마를 대여해 준다. 남자들의 의상은 큰 구애를 받지 않지만 여자들은 대부분 자미에서 제공하는 히잡을 반드시 써야 했다. 가정 내에서 생활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터키를 여행하면서 여성들의 사회 생활이 남성들보다 제약이 많다는 것은 여러 장면을 통해 계속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역시 유교 문화 안에서는 남녀 겸상도 불허하지 않았던가. 이런 여성을 향한 사회적 장치들이 어떤 문화적 효용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문화적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이라 생각한다. 예전에 인도에서 만난 초등학교 선생님이 카스트 제도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역설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인도 하층민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생각하면 슬펐다. 카파도키아의 지하 도시에서도 나는 참 슬펐다.


<이스탄불의 대표적인 모스크인 술탄 아흐멧 자미>


<술탄 아흐멧 자미에 가면 이슬람교의 다양한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자미 안에서 수많은 무슬림(남자)와 무슬리마(여자)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매일 하루 5번의 기도를 하고 또 기도를 한다. 이들은 알라신과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을까? 엄숙하고 간절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나도 같이 경건해진다. 사실 나는 특정한 종교를 믿지도 않고, 종교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도 않다. 다만 종교인들의 경건함에는 경의를 갖고 있다. 자미 안의 분위기가 예상과 달리 아주 자유롭다. 관광객들은 여기저기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고 아이들은 웃으며 뛰어다닌다. 막연하게 우리나라 절간과 같이 기도 소리만 울려 퍼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기둥에 조그만 팻말이 붙어 있었다.


"To understand ISLAM. Please contact our specialist in the ISLAM information center."


극단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해서 이슬람의 이미지는 잔혹함의 상징이 되어 있다. 물론 그들의 행위는 결코 이해받을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들이다. 하지만 그들로 인하여 모든 무슬림들이 지탄을 받아서도 안 될 것이다. 자미 안의 분위기와 이슬람을 이해해달라는 문장에서 그들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여행 전 읽었던 문고본 몇 권이 전부지만, 그들의 진심은 충분히 나에게 전해졌다.


또다시 타박타박 걸어서 구시가와 신시가를 가르는 골든 혼(Golden Horn)으로 향한다. 해안에는 유럽 지역과 아시아 지역을 연결하는 배들이 줄지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바닷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직장은 해운대였고, 집 근처에는 광안리 바닷가가 있어서 늘 보던 바다인데도 바다는 언제 봐도 좋다. 갈라타 다리를 건너면 신시가 지역이다. 갈매기가 날고, 정박한 배 위에서 생선을 넣은 샌드위치를 연신 만들어 내고, 땡땡 소리를 내며 다리를 건너가는 트램만 바라보고 있어도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간다. 유명한 건축물이나 예술품을 보는 것도 좋지만, 시간이 멈춘 듯한 이런 풍경이 나는 더 좋다. 특히 지나다니는 트램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제야 터키에 온 실감이 난다.


<이스탄불 구시가와 신시가 사이에 있는 바다 골든혼. 건너편에 보이는 곳이 신시가이다.>


<도로 위를 달리는 트램은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바라만 보던 트램을 타고 신시가로 향한다. 탁심 광장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스틱클랄 거리는 이스탄불의 명동이었다. 구시가 지역이 관광객들로 북적인다면 이 곳은 터키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신시가라고 이름부르지만 고풍스러운 건물이 줄지어 서 있고 노면 전차는 옛 모습 그대로 여전히 운행되고 있었다. 옛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 좋았다. 만약 명동에서 광화문까지 전차가 계속 다니고 있었다면 우리에게도 큰 문화 유산이자 관광 자원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자가용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불편을 주었겠지만 말이다.


백화점으로 보이는 건물을 들어가려는데 공항에나 있을법한 엑스레이 검사기가 입구에 놓여 있다. 가방을 통과시키고 금속 탐지기를 거쳐야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예전부터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얼마 전 구시가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로 인해 검문검색이 강화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스탄불 시내를 걸으며 그 날의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도심은 평화로웠고 사람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모두의 기억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중요 건물마다 배치된 무장 경찰 혹은 군인들을 통해 내재된 불안을 엿볼 수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무고한 다수의 사람들을 향한 폭력은 용서받을 수 없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걷고 싶은 거리 탁심 거리의 풍경들>


내가 남자라 그런지 한국 화장품에 대해서 딱히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터키 번화가 한가운데 있는 미국 화장품 유통 브랜드 매장에서 'KOREA BEAUTY' 특별전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 위상이 피부로 느껴진다. 제품의 품질이 우수한지, 합리적인 가격이 매력인지, 한국인들의 화장 기술이 뛰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국땅에서는 누구나 애국자가 되는 것 같다. 내가 바로 한국인이라고 매장에 있는 여성 고객에게 말이라도 걸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포스터 속 모델이 아무리 봐도 한국인 같지 않은 것은 왜일까.


<터키에서도 한류 열풍은 계속 된다.>


한참을 걸으니 다리가 아프다. 종일 걷기만 했다. 분노의 아침 식사 이후로 먹은 것도 없다. 신시가에서 구시가까지는 대략 10Km 정도다. 고민하다가 그냥 걷기로 한다. 이스탄불 시내는 트램과 버스 그리고 지하철과 여객선까지 다양한 대중교통이 촘촘하게 짜여 있어서 이동하기가 참 수월하다. 다만 우리나라와 같은 환승 시스템은 정착되어 있지 않아서 악빌 또는 이스탄불 카드라고 하는 교통 카드를 사지 않으면 한 번 탈 때마다 4리라(1200원)짜리 토큰인 제톤을 사야 한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토큰 몇 개 사다보면 지출이 상당하다. 그래서 숙소까지 그냥 걷기로 한다. 여행 중 지출의 대부분이 식비와 교통비이다. 누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니 빨리 간다고 누가 반겨주는 것도 아니다.


트램을 타고 건넜던 갈라타 교를 걸어서 건넌다. 석양을 등지고 서 있는 모스크의 모습이 경이롭다. 2천 년 전의 기술로 저 높은 첨탑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생각하며 아픈 다리를 이끌고 가는데 앞서가던 구두닦기 청년이 구둣솔을 떨어뜨리고 간다. 자기 밥줄일 텐데 한심하다. 구둣솔을 떨어뜨렸다고 일러주니 연신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린다. '뭐 이 정도를 가지고 그러나. 한국 사람들 모두 정이 많아서 다 착해~.' 라는 말을 너그러운 웃음 속에 실어서 보낸다. 보람차다. 그런데 이 친구가 달려오더니 신발을 닦아주겠단다. 괜찮다고 내 신발 운동화라서 안 닦아도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호의를 무시하면 무안할까 봐 못 이기는 척 발을 올린다. 


"어디서 왔어?"

"나 한국에서 왔어."

"한국? 우리 형제잖아! 오 브라더~"

"응. 만나서 반가워."

"너 아기 있어?"

"응? 나 결혼도 안 했어. 아니 못 했어. ㅋㅋ"

"난 태어난 지 1개월 된 아기가 있어. 엄마랑 아기는 앙카라에 있고 나는 이스탄불에서 돈 벌고 있어."

"그렇구나. 아기 보고 싶겠네."

“응. 너도 얼른 아기 낳아. 나 돈 많이 벌어서 앙카라 가야 해.”

“넌 참 좋은 아빠구나.”

"자~ 다 닦았어. 새 신발 같지?"

"응. 고마워. 안녕~"

“형제야! 신발 닦아 줬으니 돈 줘."

“…..응?!”

"돈 조금만 줘."

“…..얼마?"

"10리라(4000원)만 줘."


이 자식이 장난하나. 갑자기 성질이 뻗친다. 처음부터 나를 타겟으로 일부러 구둣솔을 떨어뜨렸던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타인을 향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타겟으로 하는 유치한 사기 수법이었다. 4리라 아끼려고 2시간 반을 걸어가는 사람한테 10리라를 내놓으란다. 남의 나라에서 소리 높여 싸울 수도 없는 일이라 조용히 이야기한다.


"나 돈 없어서 탁심부터 걸어왔어." 


그랬더니 웃으며 농담이라며 그냥 간다. 그렇게 구두닦기 청년이 가고 나서도 화가 사그라지지 않는다. 아침부터 쌓인 터키 사람 모두를 향한 분노가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결국 더러웠던 운동화는 어느새 깨끗해졌고, 나는 돈을 주지 않았으니 나의 승리였다. 그 청년이 다시 돌아와 내 이름을 물으면 '아Q'라고 대답해 줘야겠다. 갑자기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날 숙소까지 걸어오면서 내 앞에 두 번이나 더 구둣솔을 떨어뜨리는 중년 아저씨와 할아버지를 보면서 내 관상이 아주 선하다는 아름다운 결말을 얻고 다시 나는 행복해졌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인상 좋아보이는 얼굴을 골라 구둣솔을 흘리고 줍기를 반복하겠구나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귀여운 구두닦기 사기꾼들 덕분에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나는 사기꾼들 덕분에 내가 호감형이라는 결론을 서둘러 내리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아Q정전'을 읽어야 할 것 같은 이스탄불의 첫날이 지나간다.


<구두닦기들이 구둣솔을 그렇게나 많이 흘린다던 갈리타 교에서 바라본 일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