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박타박 아홉걸음

타박타박 세계일주 10 ::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런 게 여행 아니겠어? 본문

여행

타박타박 세계일주 10 ::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런 게 여행 아니겠어?

한성은 2016. 6. 15. 15:35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니

원하는 대로만 살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 건

설레는 일이야 두렵기는 해도

산다는 건 다 그런 거야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여행스케치,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니' 노랫말 중에서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런 게 여행 아니겠어?' 

카파도키아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니며 온종일 불경처럼 외고 다닌 문장이다.



카파도키아 박물관 패스를 사면 일곱 군데에 흩어진 유적지를 갈 수 있다. 유직지 내에 추가 입장권이 필요한 때도 있기에 실제로 갈 수 있는 유적지는 괴레메 야외 박물관과 세 군데의 지하 도시(Underground City) 정도다. 카파도키아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가장 중요한 유적지가 이 지하 도시들이기 때문에 패스(45리라) 가격이 전혀 아깝지 않다. 카파도키아를 여행한다면 박물관 패스는 필수다. 


사진 1 [타박타박 아홉걸음 : 터키의 박물관 패스 티켓 가격. 흘림체는 터키인들에게 적용하는 가격이고, MUSEUM PASS가 외국인 여행자를 위한 패스다. 참고로 TICKET은 패스 없는 단일 입장권이다.]


카파도키아를 여행하는 가장 편안한 방법은 레드 투어, 그린 투어 등으로 불리는 여행사 투어를 이용하는 것이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박물관과 유적지, 전망 좋은 곳을 다녀오는 일일 투어다. 먼 곳은 30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는 아니어서 많은 사람이 투어 상품을 이용한다. 점심과 유적지 입장료와 가이드까지 포함이라고 했다. 물론 몸이 편한 만큼 비용은 상당하다. 나는 이틀로 나누어 로컬 버스로 먼 곳을 다녀오고, 다음 날엔 작은 스쿠터를 하나 빌려서 구글 맵과 위키피디아로 무장한 채 박물관 패스를 들고 구석구석을 다니기로 했다. 이 선택이 카파도키아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냥 그게 제일 돈이 적게 드는 방법이었다. 돈은 나를 가이드 북에도 없는 곳을 로컬 버스를 타고 여행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식당 종업원에게 목적지를 보여주고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하니 이렇게 저렇게 타고 가서 갈아타면 되는데, 그다음은 다음 도시에서 또 물어보고 가면 된다고 쉽게 이야기한다. 나도 쉽게 알겠다고 했다. 쉬울 줄 알았다. 언제나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 문제는 내가 처음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도 잊고 있었다. 처음은 언제나 어렵다.


위즈코낙 지하 도시(OZKONAK YERALTI SEHRI)를 가기 위해서는 괴레메에서 로컬 버스를 타고 아바노스까지 간 다음 다시 위즈코낙 지하 도시까지 가는 미니 버스를 타면 된다. 자가용으로 간다면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카파도키아가 여행자들에게는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터키 사람들에게는 그저 작은 시골 마을일 뿐이다. 그래서 교통편이 좋지 않다. 로컬 버스는 1시간에 한 대가 다닌다고 했다. 버스 정거장에서 '저 버스가 그 버스인가?' 고민하는 사이에 그 버스는 지나갔고, (사실 버스는 하나밖에 없었다.) 다음 버스를 타는 데까지 90분이 걸렸다. 그리고 10분 뒤에 내렸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런 게 여행 아니겠어?'


사진 2 [타박타박 아홉걸음 : 카파도키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 아바노스는 도자기로 유명한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아바노스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있다.]


다음 버스를 타기 위해 슈퍼마켓에 들어가서 위즈코낙 가는 버스를 물어보니 슈퍼마켓 점원들이 모두 도망을 간다. 영어로 말을 해서 그런가 보다. 나도 한국에서 그랬다. 누가 영어로 물어보면 '읭?!@#$!@#' 이런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피했다. 너무나 보편적인 반응 아니었을까? 싶지만, 그때 그때의 그때를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그러다가 젊고 곱고 마음씨까지 착한 아가씨가 손짓과 발짓과 터키어를 사용하여 버스 정거장을 가르쳐 준다. 결론은 "요 앞이야. 조금만 걸어가면 돼." 였다.


요 앞에 있는 버스 정거장을 찾아 조금만 걸어가려는 데, 버스 정거장은 없었다. 그리고 강을 건넜다. 카파도키아의 상징 같은 붉은 강(Red River)이었다. 조금만 걸어가면 요 앞에 있는 버스정거장을 찾기 위해서 두 번을 더 멈춰 서서 물어봤고, 한 번은 지나가던 멋진 신사분이 지도를 들고 멍청히 있는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서 길을 가르쳐 주셨다. 터키 사람들 너무 좋다. 어딜 가나 대도시와 멀어질수록, 관광지와 멀어질수록 사람들은 여유가 넘치고 온화해진다. 우리나라도 똑같다. 다만 문제는 내가 처음이라는 것뿐이다. 계속해서 헤매고 있다. 삶은 옥수수를 파는 청년이 나를 부른다. 옥수수는 됐고, 위즈코낙 가는 버스 정거장이 어디냐고 물었다. 이 친구 갑자기 손가락으로 멀리를 가리키더니 빨리 가라고 외친다. 손끝을 따라가 보니 버스 정거장이 있다. 냅다 뛰었는데 눈앞에서 노란색 버스가 떠나버렸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런 게 여행 아니겠어?'


옆에 있던 경찰관에게 버스 언제 오냐고 물어보니 또 1시간 뒤에 온단다. 버스 타고 15분 정도면 되는 거리인데, 그냥 걸어갈까 하고 지도를 봤는데 편도 2시간 30분은 걸린다고 나온다. 삶은 옥수수 청년에게 다시 걸어가서 버스 놓쳤다고 옥수수를 사 먹고 옥수수 같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고 1시간 만에 버스 정거장으로 돌아갔다. 털털거리며 노란색 버스가 온다. 기사 아저씨에게 위즈코낙 지하도시에 가냐고 확인차 물어봤더니, 안 간단다. '읭?!@#!@#' 이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버스가 휭 가버린다. 


옥수수 같은 청년이 잘 못 알려준 걸까, 경찰관 아저씨가 나를 속인 걸까. 망연자실해지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의심스럽게 생긴 아저씨가 거기 아니라고 따라오라고 한다. 이번엔 택시 호객인가보다. 점점 지쳐간다. 그 옆에 있던 의심스럽지 않게 생긴 청소부 아저씨가 나를 향해 손짓으로 아저씨 말이 틀렸다고 따라가지 말라고 한다. 고마우신 분이다. 터키 사람들은 참 좋구나 하고 있는데, 의심스러운 아저씨와 의심스럽지 않은 청소부 아저씨가 갑자기 실랑이를 하기 시작했다. 서로 '네가 맞네, 내가 맞네'하고 있었다. 나는 또 당황하기 시작했다. '비루한 나를 위해 이러지들 마세요.'라고 외치려던 순간, 의심스러운 아저씨가 논쟁에서 승리를 해버렸다. 그리고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따라오란다. 그리고 택시가 아닌 웬 담벼락 앞에 나를 데려다줬다. 버스 표지판도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면 돼. 30분 뒤에 올 거야."라고 이야기를 하더니 쿨하게 가버렸다. 가는 뒷모습은 의심스럽지 않은 아저씨였다.  


작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던 할머니 세 분이 일제히 나를 보신다. 그냥 웃었다.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다. 위즈코낙에 간다고 하니 또 토론이 시작되었다.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내 존재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택시를 탔더라면 20분 만에 갈 수 있는 곳을 세 시간을 쏟아붓고도 절반 밖에 못 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런 게 여행 아니겠어?'


사진 3 [타박타박 아홉걸음 : 미니 버스를 기다리기는 동안 아바노스 구석구석을 다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나의 질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위즈코낙은 이 지역 전체의 지명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내가 아무리 "위즈코낙 예랄티 쉐흐리"라고 해봐야 발음이 달라 알아듣질 못했다 그냥 '위즈코낙'이라고 했더니 슈퍼마켓 아가씨가 알아듣길래 이후로 계속 위즈코낙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명동 성당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명동 가는 버스 타려면 어디서 타요? 몇 번 타야 해요? 언제 와요?' 이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찾아가려는 지하도시는 외따로 떨어진 곳이라 여행객이 거의 없는 곳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어쨌든 할머니들이 여기 있으면 버스 온다고, 할머니도 거기 간다고 같이 가자고 했다. 이제 정말 뭔가 제대로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연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고 있는 건가 싶은 순간에 지나가는 학생들이 나한테 관심을 보이며, 어디서 왔냐, 어딜 가냐, 물어보기 시작했다. 덕분에 30분 뒤에 버스가 온다. 그거 타면 "언더그라운드 시티" 간다고 했다. 


'아. 고마워 얘들아. 나중에 커서 한국 여행 오면 내가 꼭 버스 타는 거 가르쳐 줄게.' 


그렇게 힘들게 탄 버스는 나를 정확한 목적지 앞에 내려 주었다. 같이 탄 할머니가 나보고 그 전에 내리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버스 기사님이 구해주셨다. '할머니는 여기서 내려야 하고, 너는 더 가야 해.' 라는 어려운 문장을 눈빛으로만 이야기했다. 대단하시다.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위즈코낙 지하도시를 볼 수 있었다. 개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몇몇 편의시설은 공사 중이었고, 주변에는 조그만 기념품점이 딱 하나 있는 것 외에는 그냥 벌판이었다. 그래서 가이북에도 없고, 관광객도 없고, 나는 그렇게 힘들게 온 것이었다.


사진 4 [타박타박 아홉걸음 : 아직 완전하게 완공되지 않은 위즈코낙 지하도시의 박물관 건물]


사진 5 [타박타박 아홉걸음 : 주변이 황량하여 지하도시 맞은편에 있는 기념품점이 유일한 건물이다.]


직접 땅속으로 내려가서 눈으로 본 유적은 '지하도시'란 단어가 갖는 호기심과 신비함을 한순간에 거대한 슬픔으로 치환시켰다. 이슬람의 박해를 피하고자 기독교도들이 선택한 것은 땅을 파고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곳 위즈코낙은 개방된 지하도시 중에서는 작은 편에 속하는데도 지하 6층까지 내려가는 거대한 규모였다. 그림으로 본 지하도시는 개미집과 닮아 있었다.


곳곳에 조명을 켜 두긴 했지만, 땅속은 어두웠다. 그리고 습했다. 아래에서부터 습하고 찬 바람이 계속 불어왔다. 무서웠다. 외부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 코를 잡고 물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간간이 들리는 발걸음 소리는 지하도시 전체에 울리며 퍼져 나갔다. 하울링이 너무 심해서 바로 옆 사람이 아니면 대화가 힘들었다. 단체 관광객이 지나갔는데, 뭐라고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냥 '웅웅' 소리만 났다.


지하도시에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일단 곳곳에 교회가 있었다. 그리고 크고 작은 포도주 저장고가 많았다. '지하에서도 술은 마시고 살았구나'하고 짧게 생각했는데, 성경에서 포도주는 주님의 피라고 하여 예배할 때 아주 중요한 품목이라고 했다. 종교의 힘은 땅속에서도 포도주를 만들 게 했다. 포도를 재배하고 옮기고 발효를 시키는 일련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을지 가늠이 안 된다.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뿐이다. 그리고 역시 무섭다.


지하도시에는 나귀들을 먹이던 마구간도 있었고, 층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구멍을 뚫어 놓은 지하동굴 전화기도 있었다. 외부의 침임으로부터 대항하기 위하여 모든 통로들은 쪼그리고 앉아 지나가도록 매우 좁게 설계가 되어 있었다. 중간에 지쳐서 주저앉으면 뒤로 가지도 못하고,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누가 도와주러 가지도 못했다. 폐소공포증 같은 증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좁은 통로를 지나 더욱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 때는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지금은 전기가 있어서 환하게 불이라도 밝힐 수 있다지만, 옛날에는 양초도 기름도 귀했을 텐데 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이들은 왜 이렇게 햇볕이 들지 않는 땅속으로 들어와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이렇게 처절하게 신을 모시면, 신은 인간의 기도에 조금 더 열정적으로 반응해줄까. 사후 세계가 있다면 이들에게 더 좋은 자리가 보장되어 있는 걸까. 또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불경스러운 질문들이겠지만, 신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이냐고. 물론 신이 강요하지 않았고, 그들이 원해서 선택한 삶이겠지만 말이다.


한 시간 정도 지하에 있었는데 나중에는 너무 답답해서 얼른 나오고 싶었다. 무거운 공기를 계속해서 마시고 있으니 내가 땅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밖으로 나왔다. 지하도시를 빠져나와 햇볕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햇볕이 주는 안도감이 이런 것인가 보다. 일조량과 우울증 발병이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원초적인 것들에 대해서 더욱 민감해지는 것 같다. 물과 음식, 바람과 공기, 햇볕 같은 것들에 예민해지고, 그것에 대한 경외와 감사한 마음이 커지고 있다. 이런 작은 성찰들이 나의 내면을 성장시켰으면 좋겠다고, 욕심을 부려본다.


사진 6 [타박타박 아홉걸음 : 지하도시 입구, 주거 시설, 마구간, 층간 이동 통로]

사진 7 [타박타박 아홉걸음 : 주변 언덕 아래 전부가 거대한 지하도시이다.]


오후 5시. 해는 아직 중천에 있다. 다음은 어딜 가볼까 하며 어슬렁어슬렁 나가는데, 기념품 판매와 식당을 겸하는 가게의 주인아저씨가 나를 보고 뭐라 뭐라 한다. 기념품에는 관심이 없고, 관광지의 식당에 들어갈 만큼 여유롭지 않아서 가볍게 무시하고 버스를 타려고 섰다. 주인아저씨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버스가 없다고 택시를 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게 앞에 택시가 한 대 있었다. 


'누굴 바보로 아나? 여기 올 때도 버스를 타고 왔는데 무슨 소리야. 터키에 좋은 사람 많던데, 저런 장사꾼 때문에 국가 이미지를 망치는 거야. 쯧쯧...'


나는 시크하게 주인아저씨의 말을 무시하고, 늘 나 같은 관광객의 편에서 우리의 편의를 위하여 노력해 줄 것으로 생각하는 박물관 안내소로 들어가서 아바노스로 가는 버스가 언제쯤 오는지 물어봤다.


"5시에 버스 끊겨. 내일 아침까지 버스 없어. 여긴 작은 마을이니까."


망했다. 주인아저씨의 이야기가 정확하게 맞았다. 나의 시크한 표정과 도도한 걸음이 부끄러움으로 바뀌어 내 고개를 땅으로 끌어 내린다. 주변은 정말로 황량하여 아무것도 없다. 일단 사과부터 해야 했다.


"아저씨 미안해요. 당신을 믿지 않았어요. 이제 겨우 오후 5시잖아요. 버스가 없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내 말이 맞았지? 괜찮아. 이해해. 나는 너를 도우려고 했던 말이었어."

"그럼 아바노스로는 어떻게 가야 해요?"

"음.. 아까 그 택시는 가 버렸고, 버스는 없어. 걸어 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야. 전화해서 택시를 불러야겠는데?"


나는 택시비도 겁이 났지만, 일단 전화가 없었다. 그리고 전화로 하는 영어는 정말 괴로운 것이다. 거기다가 상대방은 영어를 못 할 가능성이 내일 아침 동쪽에서 해가 뜰 확률만큼 높다. 난감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런 게 여행 아니겠어?'


그나저나 어쩌나. 망한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걸어 줄까?"


아저씨는 바로 콜택시에 전화를 걸어주었다. 그리고 너무나 고맙게도 얼마인지 물어봐 주고 바로 택시를 부르지 않고 나에게 선택하라고 해주었다. 택시비가 예상을 훨씬 초월하는 가격이라 아저씨의 입에서 나오는 숫자만 듣고도 온몸에 한기가 서릴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고민을 좀 하겠다고 했다. 아저씨는 또 쿨하게 그러라며, 가게에 앉아서 쉬라고 했다. 어쨌든 고마우니까 잘 안 마시는 홍차(chai)를 주문했다. 따뜻한 홍차를 아주 좋아하는데, 밖에서 사 먹으면 조그만 잔에 800원이나 해서 인터넷을 꼭 해야 하거나, 도저히 더 걷지 못할 것 같을 때가 아니면 못 마셨다. 터키 사람들은 홍차를 하루에 10잔씩은 마시는 것 같았다. 아저씨가 고마운 것도 있지만, 오후가 어느새 해가 숨고 빗방울이 떨어져 갑자기 몹시 추워졌다. 카파도키아의 날씨는 정말 5분 후를 예상할 수가 없다. 지하도시의 여파와 내야 할 택시비까지 더해져 온몸이 으슬으슬했다. 따뜻한 것이 필요했다.


홀짝홀짝 마시니 금세 바닥이 드러났다. 아쉬움에 쩝쩝거리며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는데,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내 앞에 새 홍차를 한 잔 더 내려놓고 갔다.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슬펐다. 터키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몇 잔씩 마시기 때문에, 나도 그럴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마셨다. 따뜻한 홍차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주인아저씨가 세계문화유산 카파도키아 영어 가이드북을 가져왔다. '이건 안 돼요. 안 사요.' 마음속으로 단호하게 세 번을 외친 다음에 "나 영어 읽을 줄 몰라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 아저씨 뭔가를 펼쳐 놓고 설명을 하신다. 책 사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깜짝 놀랄 이야기가 책 속에 그리고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가이드북 속에는 위즈코낙 지하도시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 속의 할아버지는 조금 전 나에게 두 번 째 홍차를 가져다준 그 할아버지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의 아들이라고 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이야기인지 몇 번을 확인했다. 사진과 할아버지 얼굴을 번갈아가며 살피고, 주인아저씨의 명함에 적힌 이름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정말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이 슬픔에 가득 찬 지하도시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과 마주하고 있다니.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고 야단법석을 피운다.

사진 8 [타박타박 아홉걸음 : 세계문화유산 카파도키아 가이드북에 실린 위즈코낙 지하도시 편. 사진 속 할아버지가 래피트 애자르씨이다.]


사진 9 [타박타박 아홉걸음 :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의 유적을 찾아내신 대단한 애자르 할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의 이름은 래피트 애자르(Latif Acer)였고, 주인 아저씨의 이름은 뤼풀라 애자르(Lutfullah Acer)였다. 들리는 대로 받아 적어서 한국식 발음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뤼풀라 아저씨가 발견 당시의 이야기와 지하도시에 관련한 기본적인 내용들을 다시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여기서 돈 때문에 장사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장사꾼이 "나는 돈 벌려고 장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말은 마치 전 대통령이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애자르 아저씨는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아저씨는 아바노스에 빵집도 하고 다른 사업도 있다고 했다. 여기서 기념품점과 레스토랑을 하는 것은 그저 아버지를 위한 것이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만난 우리가 친구 아니겠어?"


불순물이 끼지 않은 순수한 문장이 내 귀에 들렸다. 나는 오직 경계하는 자세로만 관광지의 주인아저씨를 바라보았는데, 아저씨는 나를 돈 쓰러 온 관광객이 아니라 아버지의 업적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찾아온 귀한 손님이자 친구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무례할 수 있었던 나의 지나친 경계심이 또다시 부끄러워진다. 물론 그렇다고 앞으로 나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애자르 같은 아저씨만 있으면 좋겠지만, 아닌 사람들도 같은 비율로 존재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비는 더 거세질 것 같고, 택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서 그냥 걷기로 마음먹고 나서려는데 아저씨가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그러더니 뭔가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내 친구가 너희들 이야기를 듣고 너희 숙소까지 태워준대. 근데 공짜는 아니고 기름값 정도는 줘야 할 것 같아. 어때?"


이렇게 고마울 수가. 사실 이 비를 맞고 아바노스까지 2시간 30분을 걸어가서 다시 최장 1시간을 기다려서 버스를 타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바노스에서 괴레메로 가는 버스가 그 시간에도 운행을 하는지조차 몰랐다. 물론 우산도 없고, 랜턴도 없었다. 그런데 애자르 아저씨 덕분에 숙소까지 한번에, 택시비의 1/3 가격으로 갈 수 있게 됐다. 고맙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이번에는 아저씨가 기념품으로 파는 양말을 한 켤레 가지고 온다. 카파도키아가 크게 새겨진, 영원히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양말이다.


"너 발이 무척 추워 보여. 여행하려면 따뜻해야 해. 이거 신고 가."


내가 정말 돈이 한 푼도 없는 거지는 아니다. 사실 통장 잔고는 넉넉하게 있고, 말만 하면 다 아는 은행에서도 나에게 급전 필요하면 언제든 당겨서 쓰라고 문자메시지를 통해서 자주 연락이 온다. 나 이래 봬도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양말은 그냥 받을 수 없다고 계산을 하겠다고 했다. 


"양말 값은 내가 낼게요."

"친구한테 누가 돈을 받나. 그냥 신어라."

"나는 이미 충분히 많이 받았어요."

"아니다. 네가 추워 보여서 그런 거다."


우리나라 포장마차 앞에서 친한 친구 둘이 서로 계산하겠다고 다투는 풍경과 닮았다. 양말 한 켤레에 내 체온이 3도쯤 올라간 것 같고 온 세상이 1도 정도 따뜻해진 것 같았다.


사진 10 [타박타박 아홉걸음 : 애자르 아저씨가 나누어 준 마음으로 나는 온 세상이 따뜻해진 것 같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속상해요. 실은 내가 여행을 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데, 거기에 오늘 이 이야기를 꼭 남기고 싶어요. 여기 지하도시는 가이드북에도 없어서 사람들이 잘 오지 않아요. 내가 소개할게요. 할아버지 이야기도 꼭 쓸게요."


내가 무슨 세계적인 기자도 아니고, 내 글을 서로 읽으려고 달려드는 대문호도 아닌데 이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여행자가 꺼낼 수 있는 마음은 오직 '현금' 밖에 없는데, 상대방이 '현금'이 아닌 '마음'을 꺼내니 나는 아주 무력해졌다. 애자르 할아버지와 애자르 아저씨가 이 글을 읽게 될 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연락처를 받아 왔으니까, 사진은 볼 수 있겠지 싶다.


다시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은 호의였다. 비싸지 않은 나눔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받은 내게는 터키 전설 속에서나 구전될 법한 호의였고, 프랑스 명품 브랜드 양말 따위는 감히 품지 못할 마음이 담긴 카파도키아 양말이었다. 앞으로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서 내 마음이 더 따뜻해질까. 고맙다는 말도 잘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아저씨가 불러 준 친구가 차를 가지고 왔다. 계산을 하려고 갔더니 계산서에 '홍차 한 잔(chai 1)' 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홍차값 800원을 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런 게 여행 아니겠어?'


사진 11 [타박타박 아홉걸음 : 지니고 있으면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블루 아이(Blue Eye). 터키 어디를 가나 쉽게 볼 수 있다. 사진에 담기만 해도 행운이 오는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