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박타박 아홉걸음

타박타박 세계일주 11 :: 고대 유적의 중심에서 온천욕을 외치다. 본문

여행

타박타박 세계일주 11 :: 고대 유적의 중심에서 온천욕을 외치다.

한성은 2016. 7. 12. 06:35

하늘에선 비만 내렸어 뼈 속까지 다 젖었어 

얼마 있다 비가 그쳤어 대신 눈이 내리더니 

영화서도 볼 수 없던 눈보라가 불 때 

너는 내가 처음 봤던 눈동자야 

낮 익은 거리들이 거울처럼 반짝여도 

니가 건네주는 커피 위에 살얼음이 떠도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꺼야 

바다 속의 모래까지 녹일 꺼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꺼야 

얼어붙은 아스팔트 도시 위로

검정치마, 'antifreeze' 노랫말 중에서


카파도키아에서는 오락가락하는 날씨 때문에 별일을 다 겪고 다녔다. 애초에 날씨부터 처음 겪는 이상 기후였다. 열대 기후 지역을 가도 열대성 소나기는 내릴지언정 땡볕 아래에서 국지적으로 쏟아지는 폭우와 우박을 맞지는 않을 것이다. 저 멀리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며 먹구름 아래에서 엄지손톱만한 우박을 맞아야 했던 그날의 이야기다.


카파도키아의 마지막 날 찜통 같은 더위 속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전날 사 놓은 카파도키아 박물관 패스에 있는 곳들을 모두 돌아보겠다며 호기롭게 오토바이를 빌렸다. 오늘 목적지는 카파도키아 지역 지하도시 중에서 가장 크다는 카이막클르(Kaymakli)와 데린쿠유(Derinkuyu) 지하도시이다. 두 곳 모두 숙소가 있는 괴레메에서는 30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오토바이를 빌려서(50리라, 2만원) 다녀오기로 했다.


두 지하도시 모두 전날 갔었던 위즈코낙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지하 55m위치에 8층 구조로 된 전형적인 개미집에는 동시에 200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수십개의 교회, 거대한 홀, 포도주 저장고, 주거 공간, 외양간, 무덤 등이 어두운 지하 세계에 만들어져 있었다. 한 두 세대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초기 크리스트교 시대부터 비잔틴 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라 하니 최소 300년 이상 계속되었던 지하도시의 삶이었다. 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인간이 수 세대를 거쳐 살 수 있었을까. 인간은 땅 속에서 살 수 있도록 진화한 동물이 아닌데 말이다. 인간의 능력과, 종교적 신념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그러나 역시 한편으로는 불편해진다. 종교적 신념 대체 그것이 무엇이길래 인간의 삶을 이토록 처참하게 만들까. 어쩌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뿐, 그들의 신과 함께 살았던 이곳 주민들은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사진 1. 카이막클르 지하도시의 입구와 내부 모습. 억압을 피해 이들이 선택한 곳은 빛이 들지 않는 지하였다.


오후 늦게 데린쿠유 지하도시에 도착했는데 또 아이들이 몰려든다. 역시나 학교에서 단체 여행을 온 것 같았다. 터키가 유명한 관광 국가이지만 몇몇 중심지만 그렇지 지방 소도시에 있는 아이들은 외국인이, 게다가 유럽인이 아닌 아시아인이 신기한가보다. 지난 번에 몸으로 느꼈던 한류 열풍을 떠올리며 코리아에서 왔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 아이들은 모른다. 2002년 월드컵의 감동을 모른단 말인가! 터키 사람들은 축구를 정말 좋아한다. 동네마다 프로축구팀을 상징하는 깃발이 항상 꽂혀 있고, 식당 안에 있는 텔레비전은 늘 축구 중계를 틀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이들 알고보니 초등학생들이었다. '너희가 갓난아이일 때 말이야, 월드컵 역사상 유례 없는 감동적인 경기를 했단다~' 말한다고 한 들 알리가 없다. 몇 살이냐고 묻는 것도 서로 어려워 "헬로우"만 주고 받고 악수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다. 아이들은 그냥 보기만 해도 좋다. 물론 미울 때도 있지만 말이다. 그동안 담임으로 만났던 아이들이 떠오른다. 내 글을 읽을 우리반 아이들에게, 그 중에는 벌써 성인이 된 아이들도 있지만, 그때 내가 여유롭지 못하고 너그럽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다. 


'내 그릇이 너무 작아서 너희들 모두의 말과 행동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오롯하게 담지 못해서 미안해. 언젠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조금 더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게 노력할게.'


사진 2. 데린쿠유에서 만난 초등학생들. 하나 같이 구김 없이 행복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딱딱한 책장에 앉아 하루 15시간씩 공부하던 우리반 아이들이 생각 났다. 


서늘한 지하도시를 빠져 나오니 후두둑 비가 떨어진다. 30km를 달려가야 하는데 낭패다. 배낭에 레인커버를 씌우고, 늘 가지고 다니는 방수 점퍼를 꺼내 입는다. 비를 맞으니 한기가 든다. 정해진 시간 내에 오토바이를 돌려주지 못하면 또 추가금을 내야한다. 게다가 이미 오늘 밤에 파묵칼레 행 야간 버스 표를 이미 사 놓은 상태였다. 다른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빨리 달려가는 것이 비도 적게 맞고, 돈도 아끼는 방법이었다. 그나저나 달려가는 틈틈히 스마트폰을 꺼내서 지도를 살펴보며 가야 하는데,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일단 가는 길을 머릿속에 집어 넣고 서둘러 출발했다. 부르릉.


사진 3. 평소라면 오후의 햇볕이 내리 쬐고 있어야 할 시간에 먹구름과 함께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출발하자 마자 빗줄기가 점점 거세진다. 어느새 도로 위에는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내가 빌린 오토바이는 자전거만큼 천천히 달리는 50cc 낡은 스쿠터라 빨리 달리다 넘어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보다는 오토바이가 물에 젖어 멈춰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더 컸다. 물 웅덩이는 점점 깊어졌다. 터키는 우리나라처럼 자동차 전용도로라는 개념이 없었다. 적어도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를 지나 카파도키아에 올 때까지 보지 못했으니 아마도 그런 것 같다. (특정 국가를 며칠 여행 한 경험으로 무언가를 일반화하여 말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우리나라의 지방국도 정도 되는 도로가 길게 이어져있고, 그게 곧 주요 도로이다. 대부분 왕복 4차선이다. 문제는 한적한 시골 국도를 50cc 오토바이와 컨테이너 트럭이 같이 달린다는 것이다. 빗방울은 더욱 굵어져 폭우가 되어 내리고 있고, 1차선으로는 대형 트럭이 내 키보다 높은 물보라를 뿌리며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2차선은 바다에서 다시 만나자며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 빗물이 강을 이루고 있어서 오토바이가 아니라 배를 타야 할 것 같았다. 무서운 시리아로 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이라는 것이 그 순간 생각해 낸 가장 긍정적인 요소였다. 


더 환장하게 만드는 것은 저 멀리 괴레메쪽으로 보이는 하늘은 맑게 개어 있다는 것이다. 저 멀리 파란 하늘을 보며 폭우를 맞고, 옆 차의 물벼락을 맞고, 대체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서러움까지 맞고 달렸다. 그리고 등 뒤에는 추가요금 귀신이 영수증을 들고 쫒아오고 있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는데, 대체 오늘 내게 좋은 일이 뭐가 있었는지 생각해봤다. 별로 없다. 오토바이 싸게 빌린 거? 그건 이미 열기구 투어를 예약하면서 여행사 사장님이 가진 인간 내면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빛을 발할 때 함께 싸게 빌린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괴롭힘을 당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번뜩 생각났다.


'신이 있다면 아마도 딱 이정도 높이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고 계신 게 아닐까?'


불경한 생각이었다. 신은 지상 위의 개미 똥만한 내가 50cc 오토바이를 타고 유유자적 다니는 것을 정확하게 보고 계신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 나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오토바이 계기판에 영롱하게 노란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아니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제는 기름이 없단다. 메롱.'


나무도 바위도 전혀 없는 산에서 매에게 쫒기는 까투리의 마음과

대천 바다 한가운데 일천 석 실은 배에 노도 잃고, 닻도 잃고, 용총도 끊어지고, 돛대도 꺾이고, 키도 빠지고, 바람 불어 물결 치고, 안개 뒤섞여 잦아진 날에 갈 길은 천 리 만 리 남았는데, 사면은 검어 어둑하고 천지 적막하고 사나운 파도가 치는데 해적 만난 도사공의 마음과

엊그제 임 여읜 내 마음이야 어디에다 비교하리오?


국어 교사 아니랄까봐 작자 미상의 조선시대 사설시조가 떠오른다. 까투리보다 도사공보다 사랑하는 임을 여읜 화자가 더 슬프다는데, 일단 여기 앉아서 오토바이 운전 좀 해보고 이야기 하라고 전하고 싶다. 게다가 나의 다마(多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얼굴이 따끔거리는데 처음에는 빗방울이 너무 굵어서 달리는 속력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 기름이 없다는 영롱한 노란 불빛을 본 후로는 속력을 줄여서 달렸는데, 오히려 점점 따가워졌다. 비가 아니라 우박이었다. 새끼손톱만한 우박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6월이면 여름이다. 여기서 지중해만 건너면 아프리카다. 그런데 우박이라니. 다시 돌이켜봐도 안 믿어진다. '컷!' 하는 소리와 함께 우박이 멈추고 스태프들이 달려와 훌륭한 연기였다고 말해줄 것 같았다. 영화 '트루먼 쇼'의 트루먼에게 정말 수고했다고 박수를 쳐주고 이제 나도 그만 꺼내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아니 일단 오토바이를 멈추고 이슬람 성지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장기 여행을 하다 보면 죽을 뻔 하는 경험을 여러 번 하게 된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읽었던 수많은 여행기들 속의 모든 주인공이 빠지지 않고 했던 이야기이다. 강도를 만난 이야기. 차 사고가 난 이야기. 말라리아에 걸려 병원으로 실려 간 이야기. 고산병으로 기절한 이야기 등등. 이제 나도 한 줄을 보탤 수 있게 되려나 싶었다. '오토바이 타고 가다 우박 맞아 머리에 피났던 이야기' 정도면 어떨까. 물론 실제로는 헬멧을 단단히 쓰고 있었기에 그럴 일은 없었다. 아무튼 우박은 무서웠다. 비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우박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차원이 달랐다. 얼음알갱이가 바닥에 내리깔리는 소리는 주변의 모든 소리를 삼켰다. 그제서야 공포가 밀려왔다.


이제는 정말 1m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정면에 보이는 공터로 들어갔다. 큰 화물차가 세워져 있고, 건설 현장 사무소 같은 건물이 있었다. 저 건물의 처마 아래라면 잠시 우박이라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옷이 다 젖어 너무 추웠지만, 일단 우박을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전방으로 뻗은 도로변에는 카페나 식당은 커녕 주유소도 없었기 때문에 그곳은 오아시스였다. '소나기'에서 짚단을 비워내고 비를 그었던 소녀가 되어 볼까. 그러면 안 된다. 결국 소녀가 죽는다. 나는 살고 싶었다.


"얼른 들어와!"


사무실 건물에 채 닿기도 전에 나이 지긋하신 아저씨가 뛰어 나와서 손짓을 하셨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그런 손짓이었다.


'살았다.'


정말 그 순간에 든 생각은 살았구나 싶었다. 지난 사진을 찾아 메틴(Metin) 아저씨의 얼굴을 보니 괜히 울컥한다. 메틴 아저씨는 쏟아지는 우박을 온몸으로 맞으며 50cc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오는 나를 보자마자 놀란 얼굴로 달려 나와 나를 맞아 주셨던 것이다. 괜찮다고 사양하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저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사디(Sadi) 아저씨가 벌써 전기 난로의 불을 밝히고 계셨다. 전원이 켜진 코일이 내는 붉은 불빛을 보자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네모난 전기 난로의 불빛은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셨던 바로 그 불빛이었다.


두 분 다 영어를 할 줄 모르셨다. 그저 눈빛으로 손짓으로 얼른 옷을 벗어라, 여기 앉아서 머리를 말려라 하셨다. 물론 정확하게 다 알아들었다.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땡큐"를 수십번 외쳤다. 그야말로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그대로 계속 달렸다면 이 글을 못 쓰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외투를 벗어서 말리고, 전기 난로 앞에서 언 손을 녹이고 있는데, 메틴 아저씨가 따뜻한 커피를 타 오셨다. 그리고 자두 몇 알을 내어 주셨다. 사실 추위 때문에 허기를 못 느꼈을 뿐이지 종일 굶은 탓에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아저씨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내어 주고, 난로를 켜 주고, 커피를 타 주고, 자두를 나눠 주셨다. 게눈 감추듯 다 먹고 나니 웃으면서 더 많이 가지고 오셨다. 차를 마시고, 자두 몇 알을 집어 먹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든다. 뭐라고 뭐라고 하시는 데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다.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한 순간은 물건 값을 깎을 때도 아니고, 예쁜 아가씨를 만났을 때도 아니었다. 이렇게 고마운 분들을 만났는데, 몇 마디 대화도 나눌 수가 없어서 정말 속이 상할 만큼 답답했다. 그제야 스마트폰이 떠올랐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웬만한 단어 정도는 번역이 가능했다. 그때부터 아저씨들과 암호 해석과 같은 필담이 시작 되었다. 터키어 문장을 써주면 단어 하나 하나 찾아가면서 해석하고, 다시 영어로 답을 써서 터키어로 번역하여 메모지에 적어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사진 4.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자두 몇 알은 네로 황제의 식탁과도 바꿀 수 없는 성찬이었다.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거나, 이상 기후에 대한 과학적 고찰을 한 것은 아니다. 어디서 왔냐, 나이가 몇이냐, 직업이 뭐냐, 어디 가는 길이냐, 이 과일이 한국에도 있느냐 정도였다. 하지만 한참을 답답해 하다가 겨우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정말로 설레고 신났다. 소개팅에서 만난 이성이 나와 같은 인디 밴드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보다 행복했다. 터키어를 배우고 싶었다. 단어 하나 하나가 그렇게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언어 교육이라는 것이 이렇게 이루어져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배운다는 것은 어느 것이나 굉장히 힘든 일이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과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마치 모국어처럼 또는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익힌다는 것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배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것이다. 학교에서 문학 수업 시간에 시조를 가르치며 "이 작품 진짜 멋지지 않아요?"라고 했다가 아이들의 초점 잃은 눈빛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이렇게 멋진 시조를 좋아하지 않다니!' 일단은 나의 수업이 형편 없기 때문이겠다. 그리고 그전에 그런 문장을 내 입으로 뱉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나는 심지어 문학을 가르치고, 얼마나 잘하는 지 감히 평가 문제를 내고, 점수를 부여했던 사람이다. 즐거움을 제거해 버린 배움은 노동과 다름 없다. 내가 '운수 좋은 날'을 읽으며 지금도 감동을 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시험을 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수 좋은 날'은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 읽고 또 읽어도 지겹지 않다.


학교 교육 제도에서 평가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담을 주고 받던 그 순간만큼 강렬하게 '외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지를 떠올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교육 과정과 교수법이 아이들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돌려 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터키어를 배우고, 메틴 아저씨와 사디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낼 수 있다면 참 즐거울 것 같다. 낮에 만난 초등학생들과 신나게 수다를 떨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사실 다음 달에는 그리스를 지나 몰타에서 어학연수를 계획하고 있다. 짧은 기간이지만, 제대로 영어 공부를 하고 싶어서 일정에 넣었다. 아직 배우지도 않았는데 배움에 대한 기대로 설렌다. 아이들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돌려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사진 5. 더듬거리며 터키어를 한 자씩 적으며 대화를 이어가던 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우박은 다시 비로 변했다. 그런데 도무지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메틴 아저씨가 계속 걱정을 하신다.


"비가 그치질 않아. 오늘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아."

"나도 걱정이에요. 하지만 오늘 돌아가지 않으면 파묵칼레 행 버스도 탈 수가 없어요."

"여행사에 전화해서 사정이야기 해 보는 건 어때?"

"전화기는 가지고 있지만, 전화는 안 되요."

"전화번호는 가지고 있어? 내가 전화해 줄게."

"아.. 정말 고맙습니다."


메틴 아저씨가 여행사에 전화해서 무어라 이야기를 한 후 나를 바꿔 준다.


"여기 데린쿠유 지하도시 근처인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도저히 갈 수가 없어요. 조금 전에는 우박도 왔어요."

"음.. 그래서 어떻게 해줄까요?"

"그쪽에서 차를 보내주면 안 될까요?"

"(곤란해 하며) 가능하긴 한데, 비용이 너무 비싸요."

"얼마인데요?"

"거기까지 왕복 60km에요. 픽업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얼마인데요?"

"300리라(12만원) 정도 될 것 같은데요?"

"네? 말도 안 되요. 너무 비싸요."

"그러니까 직접 가지고 오는 게 나아요."

"알겠어요. 근데 괴레메는 지금 비 와요?"

"아니요. 안 와요."

"알겠어요. 내가 직접 타고 갈게요. 그런데 약속 시간보다 늦을 수도 있을텐데 어떡하죠?"

"그건 걱정 말아요. 밤 10시 전까지는 기다려 줄게요."

"알겠어요. 나중에 봐요. (꼭 그랬으면 좋겠네요.)"


항상 돈이 문제다. 그리고 돈이 해결책이다. 돈이 있으면 쉽게 풀릴 일이 돈이 없으면 어렵게 풀린다. 애초에 여행사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 가서 하소연 할 것도 아니다. 그나마 늦어도 기다려 준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이다. 어차피 밤 10시까지 도착하지 못한다면 파묵칼레 행 버스도 탈 수 없다. 그리고 밤 10시는 해가 져서 사위가 어두워진다. 대형 트럭이 달리는 도로를 오토바이를 타고 갈 수는 없다.


"이제 그만 가야겠어요. 픽업 서비스는 안 된다고 하네요."

"아직 비가 내리고 있어서 힘들텐데."

"파묵칼레 행 버스를 꼭 타야해서 어쩔 수가 없네요."

"그래, 조심해서 가."


옷을 주섬주섬 챙기고 출발 준비를 하는데, 마침 사무실에 사람들이 들어온다. 아저씨들이 부산스러워졌다. 어차피 계속 있을 상황도 안 되었다. 너무나 따뜻한 환대를 받고 나서는 길인데, 고맙다는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어제 위즈코낙에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다. 대화가 어려워 아저씨 이야기를 꼭 사람들에게 소개하겠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맙다고만 했다. 아쉬운 마음에 같이 사진을 찍고 악수를 하고 포옹을 나눴다. 앞으로도 여행을 계속하면서 이렇게 길에서 만나고 길에서 헤어지는 일이 많을 거다. 하지만 만남과 헤어짐에는 익숙해지지 말자고, 고마운 사람들을 꼭 기억하자고 다짐하고 다시 오토바이를 탔다. 인생지사 새옹지마. 조금 전에만 해도 이대로 겨울왕국의 울라프가 되어 터키의 국도변에서 손을 흔들 줄 알았는데, 메틴 아저씨와 사디 아저씨 덕분에 가난한 여행자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전기 난로 앞에 널어둔 옷이 따뜻하게 온몸을 감싸준다. 부르릉.


사진 6. 비바람이 몰아치고 우박이 떨어지던 날 나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준 사디 아저씨(왼쪽)와 메틴 아저씨(오른쪽)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섰는데 거짓말처럼 빗방울이 가늘어졌다. 게다가 언덕 너머에 주유소가 보였다. '눈 녹듯이 사라진다.'는 옛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같았다. 먹구름이 가시자 주위도 조금 밝아진다. 차가웠던 바람이 시원한 바람으로 바뀌자 1시간 전에 있었던 일들은 모두 '한여름 밤의 꿈'으로 느껴진다. 도연명이 길을 잘못 들어서 찾았다는 도원향(桃源鄕)이 그곳은 아니었을까. 신선들은 그저 하얀 도포자락을 날리는 대신 작업복을 입었고, 복숭아 대신 자두를 먹고 있을 뿐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카파도키아에서 만난 애자르씨 부자와, 메틴 그리고 사디 아저씨 모두 시간을 비켜서서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하나 깨달은 것이 또 있다.


'신은 바로 내 머리 위에 앉아서 나를 지켜 보고 있다.'


별 탈 없이 오토바이를 돌려주고, 버스 터미널에 맡겨놓은 짐을 가지고 야간 버스에 올랐다. 옷을 다 입은 그대로 물속에 빠졌다가 나온 꼴이어서 그대로 버스를 탈 수는 없었다. 물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며 몸을 데우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도 그저 제시간에 버스를 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화장실에서 입었던 옷을 모두 벗어서 비닐 봉투에 말아 넣고, 고객 서비스가 비행기 만큼 훌륭한 버스에 올랐다. 수퍼마켓 앞 벤치에서 땡볕에 데워진 물을 마실 때 그렇게 간절했던 에어컨 바람이 물에 젖은 내 머리 위로 뿌려졌다. 주변의 눈치나 체면이 문제가 아니다. 내일 다시 눈을 떠서 걷기 위해서 나는 체온을 높여야 했다. 배낭 속에서 오리털 침낭을 꺼내 그 속에 들어가 지퍼를 올렸다. 아... 한국으로 돌아가 엄마 품에 안기면 이런 느낌일까. 번데기 속 애벌레 같은 자세로 의자에 꼿꼿하게 앉아 10시간을 내리 잤다. 그렇게 카파도키아에서 파묵칼레로 이동했다.


사진 7. 석양을 받은 파묵칼레의 언덕이 노랗게 물들고 있다. 


야간 버스는 아침 해가 뜰 무렵 나를 파묵칼레에 내려주었다. 낮에 이동하는 버스도 있지만, 야간 버스는 하루 숙박비와 일정을 절약할 수 있어서 여행객들이 많이들 이용한다. 침대 버스가 아니라는 것이 함정이지만, 생각보다 의자도 좋고 간식도 주고 인터넷도 되니까 지루하지도 않고 충분히 이용할 만하다. 물론 역시 피곤하다는 것은 역시 피할 수 없다. 버스에서 내리면 눈 부신 햇살 속에서 몽롱한 채로 집채만 한 배낭을 맨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함께 버스를 타고 온 관광객들은 모두 미리 예약해 둔 숙소로 떠났고, 인터넷으로는 저렴한 숙소를 찾을 수 없었던 나만 작은 여행사 사무실에 덩그러니 놓여졌다. 마을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아 찬 기운이 감돌았다. 이질감이 드는 아침이었다. 숙소도 정하지 못한 나에게 여행사 아저씨는 패러글라이딩을 하라고 아까부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지금 싼 숙소가 필요해요."

"응, 그런데 패러글라이딩 정말 멋져. 너에게만 특별히 싸게 해줄게."

"아침에도 체크인을 할 수 있는 도미토리 숙소가 있을까요?"

"응, 그런데 패러글라이딩 정말 멋져. 너에게만 특별히 싸게 해줄게."


뫼비우스의 띠 같은 그로테스크한 대화가 이어졌다. 결국 여행사 아저씨가 선심 쓰듯 알려 준 숙소의 도미토리와 가격 차이가 별로 없는 호텔방을 발품을 팔아 구했다. 역시나 그로테스크했다. 정가(正價)라는 것은 소비자가 영원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컴퓨터 신에게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를 구하는 마음으로 숙소 주인들에게 “How much?”를 외치고 다녔다. 어쨌든 하얀 침대 커버가 있는 호텔 객실은 거의 한 달 만에 처음이었다. 심지어 조식을 준단다. 당일 조식도 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동공을 마구 흔들며 주인 아저씨를 쳐다봤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괜찮다. 나에게는 라면 스프가 있다. 물을 끓이고 라면 스프를 휘휘 풀어서 밥을 말아 먹고 밖으로 나왔다. 인스턴트 라면을 처음 만들었다는 대머리 일본 아저씨가 생각난다. 우리나라 모든 남자와 자취생과 여행자들과 숙취자들의 마음을 모아 마음 속으로 외친다. '아리가또.'


사진 8. 여행 시작 후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차려 준 아침 식사를 앞에 두고 감개무량하였다.


파묵칼레는 괴뢰메 보다도 작은 마을이다. 이 작은 마을이 유명해 진 이유는 온천수 속의 석회질 성분이 용출하면서 굳어진 새하얀 지형 때문이다. 언덕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보면 마치 눈이 내린 것처럼 새하얗다. 눈 앞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온천수는 여전히 용출하고 있어서 새하얀 암석 위에 고인 온천수는 그야말로 영롱한 에메랄드 빛을 발한다. 현실 같지 않은 이 자연경관을 보기 위해서 매년 수십만의 관광객이 파묵칼레를 찾고 있다. 카파도키아의 동굴 교회나 지하 도시는 그들의 아픈 역사를 마음에 담는 것이라 보고 있는 것만으로 참 힘들었는데, 파묵칼레는 오롯하게 자연이 준 선물을 보고 즐기는 것이라 마음이 한결 가볍다. 그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거대도시 히에라폴리스가 있다. 이 또한 파묵칼레를 찾는 큰 이유이다.


터키는 일단 국토가 넓기 때문이겠지만, 굉장히 다양하고 신비한 자연 경관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비옥한 토지가 있어 식량 자급 자족이 가능하다. 그래서 기본적인 농산물이나 빵, 과일 등이 아주 저렴하다. 그런 면에서 터키는 참 축복 받은 나라이다. 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기원전부터 수천 년간 전쟁터였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평화롭던 아프리카 나이베리아 지역에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면서 그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졌는지, 또 밀림을 파헤치고 들어간 인간의 탐욕이 불러낸 에볼라 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가 얼마나 고통 받는 지를 생각해 보면 세상 일이라는 것은 참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는 현대에도 여전히 소외 받고 아픈 사람들이 많다.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일까. 두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을 가진 체리를 1kg에 5리라(2000원)를 주고 사서 입안에 털어 넣으며 온갖 생각을 다 해본다.


사진 9. 대부분의 농산물을 자급자족하는 터키의 과일은 저렴할 뿐만 아니라 아주 달다.


마을 중심부에는 식당마다 한글 메뉴가 가득했다. 유리창 전체에 한글로 비빔밥, 볶음밥, 신라면, 오징어짬뽕, 김치찌개 심지어 '치맥' 이라고 적어 놓은 가게도 있었다. 여행객들이 써 놓은 종이에는 ‘이 집 정말 맛있어요. 친절해요.’ 라는 커다란 종이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물론 일본어나 중국어도 같은 비율로 많이 보였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 맞구나 싶었다. 물론 그러니까 나도 여기 와 있는 것이다. 가게마다 붙어 있는 한글 손글씨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다만 잠깐 멈춰 서서 보고 있으면 여지 없이 달려 나와 호객을 하기 때문에 얼른 자리를 피한다. 한글이 적혀 있는 곳에 한국인인 내가 들어가서 좋을리가 없다. 한식이 그리운 마음보다 메뉴 옆에 써 있는 가격의 두려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치맥집 아저씨는 아침 8시에 굿모닝이라고 인사를 하더니 나보고 치맥 먹고 가란다. 모닝 치맥이라니.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디인가.


'아저씨. 한국에서도 치맥은 비싸서 안 사 먹어요. 아니, 못 먹어요.' 


사진 10. 황량한 벌판에 우뚝 선 파묵칼레의 모습은 그 자체로 황홀했다.


사진 11. 파묵칼레 언덕 위에는 과거의 영광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히에라폴리스가 있다. 


파묵칼레와 히에라폴리스를 볼 수 있는 티켓은 35리라이다. 아침에 들어가서 해가 질 때까지 나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간다. 타박타박 아홉걸음. 온천수가 계속해서 흘러 넘치고 있어서 신발을 벗고 걸어 올라갔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물이 참 따뜻했다. 언덕길을 따라 만들어져 있는 웅덩이에는 온천수가 고여 물빛을 발하고 있다. 에메랄드 빛이라 들었는데 그것 보다 훨씬 하얗고 파랬다. 빛깔에 대해서 아무런 안목이 없는 나 따위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색이 아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배경 지식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어릴 적 슈퍼마켓에 팔던 우유 아이스크림만 떠올랐다. 딱 그 색깔이었다. 그냥 물인데, 이렇게 예쁠 수가 있나. 사람들이 왜 파묵칼레에 몰려드는 지 이해하고도 남았다. 태양 빛을 받은 새하얀 석회암은 정말로 눈을 제대로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반짝였고, 그 위를 걸으며 내가 했던 몇 마디 말은 ‘우와, 오오, 이야’ 정도가 전부였다. 사고가 정지한 상태에서 그저 눈에 담고, 사진에 담고, 마음에 담고 어떻게든 오롯하게 가져보려 버둥거릴 뿐이었다. 카파도키아를 거쳐 파묵칼레를 여행하면서 생긴 걱정이 하나 있었다. 이런 풍광들을 계속 보며 다니면 웬만한 곳에 가서는 감각이 무뎌지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복에 겨워 정신을 못 차리는 걱정이다.


이 곳에서도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이 마구 달려와 사진을 찍자고 한다. 이제는 익숙한 일이 되어 버린 모델 역할이다. 터키 사람들이 특별히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지, 가는 곳마다 같이 사진 찍자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시골이라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이스탄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안고 지나가던 부부는 가던 길을 돌아와서 아이와 함께 사진을 좀 찍어줄 수 있겠냐고 물어온 적도 있다. 아무튼 아이들과 연예인 놀이를 실컷 했더니, 그제서야 나보고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그런데 이 얄미운 아이들이 저패니즈와 차이니즈는 아는데 꼬레안은 모른단다. 꼬리아가 어쩌고 저쩌고 자기들끼리 한참 이야기 하더니 그냥 간다. 그래도 괜찮다. 이번에는 EXO가 아니라 그저 내가 좋아서 달려 온 것이니까. 내가 좀 멋지게 생겼나보다 하고 선글래스를 통해 괜히 내 얼굴을 한 번 본다. 괜히 봤다.


사진 12. 석회질을 함유한 온천수가 고인 웅덩이는 아이들에게 지상 최고의 놀이터였다.


파묵칼레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적지 내에 있는 온천에 몸을 담그는 것이다. 고대 도시 히에라폴리스가 지진으로 무너지면서 거대한 웅덩이가 생기고, 그곳에 온천수가 고여서 거대한 수영장이 된 곳이 있다. 박물관에서는 감히 손으로 만져 보지도 못 할 고대 유적을 발아래 두고 자연 온천에서 수영을 하는 것이다. 목욕탕이라고 해야할 지 수영장이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지만, 비누를 풀고 때를 미는 곳은 아니니까 그냥 수영장이라고 해야겠다. 이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입장권을 사야 한다. 참 얄밉고, 슬프지만,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점심 값을 아끼려고 맨빵과 버터를 챙겨왔다. 얼른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입장권을 사서 온천수 속으로 풍덩. 이번에는 타박타박이 아니라 참방참방이다.


사진 13. 사막의 오아시스를 옮겨 놓은 듯한 히에라폴리스의 온천 수영장


‘이야~ 여가 어데고? (‘여기는 어디입니까?’ 의 경상도 방언)’


탄성이 절로 나온다. 푸른 빛을 띠는 투명한 물 아래 히에라폴리스의 석조 기둥들이 누워있다. 발바닥으로 기둥들을 밟고 따뜻한 물 속에 둥둥 떠 있으니 이 곳이 지상 낙원이었다. 세상만사 모두 잊고 따뜻한 물 속에서 헤엄 치고, 사진 찍고, 아이들과 장난 치고 있는데 세상만사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사진 14. 기원 전의 고대 유적을 깔고 앉아 온천욕을 즐기는 기분이 아주 묘했다. 


같이 물장구 치던 아주머니(아가씨일 수도 있다)와 인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는 데, 이 분은 리투아니아 출신인데 영국 런던에서 살고 있단다. 런던은 최근 치러진 시장 선거 결과 때문에 아주 뜨거운 곳이 아닌가! 이 적절한 시기에 런던에 사는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이런 행운이 또 없다. 민선 5기 런던 시장에 당선된 사디크 칸은 파키스탄 이민자 출신의 무슬림이며 노동당 당원이다. 이전 시장은 보수당 시장이었다. 런던 시장 선거는 하기 전부터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파키스탄 이민자, 무슬림, 노동당 당원인 사디크 칸과 이전까지 런던시장 내리 3선을 연이어 집권하고 4선을 이어가려는 보수당의 잘생긴 잭 골드스미스 후보의 대결은 다양한 의미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선거였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가진 성향과 그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축하한다’는 말을 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 무례하거나 결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분 역시 사디크 칸의 지지자였다. 속사포 같은 속도로 익숙하지 않은 영국 영어가 쏟아졌다. 사실 영국 영어가 맞는지 정확하지 않다. 내가 그런 걸 정확하게 알 리가 없다.


런던의 주택난은 외신을 통해 전해 듣는 것보다 심각했다. 최소한 1천 파운드(현재 환율로 170만원) 이상 지불하지 않으면 아주 작은 방도 구할 수 없다고 했다. 대기업 직장인이나 의사들도 월급으로 주택 렌탈비를 감당하기 힘들다고 했다. 부동산 구입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란다. 뿐만 아니라 공공 서비스 문제도 심각해서 여전히 버스나 지하철 환승 시스템도 없다며, 사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런던 시민들이 사디크 칸에게 투표를 한 것이라고 했다. 물론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전부라고 생각해서도 안되고, 투표율과 지지율이 50% 정도이기 때문에 모든 런던 시민의 마음이 같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런던 사람들이 먹고 사는 데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래도 사디크 칸은 이민자이자 무슬림인데 대단하다고 하니 그녀는 분명하게 말했다. 


“이제 런던은 분명히 변할거야.”

“나도 10월쯤 런던을 갈 건데, 나도 느낄 수 있을까?”

“물론이지. 10월까지 갈 것도 없어. 6월이면 충분해.”

“정말 축하해. 꼭 힘든 문제들이 잘 해결 됐으면 좋겠어. 그리고 부러워.” 

“고마워. 나도 기대하고 있어.”


헐벗지 않고, 배곯지 않고, 비바람 맞지 않고 사는 문제가 이렇게 풀기 힘든 문제라니, 참 슬프다. 한국이라고 뭐가 다를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나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계속해서 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내가 은행 대출로 전세금을 내고 살던 집을 떠올려 본다. 내가 열심히 노동한 대가로 차곡차곡 아껴쓰고 정직하게 모은다면 얼마쯤 걸릴까. 어쩌면 그냥 내가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부모님도 인생 전부를 쏟아붓고 쥐어짜내 겨우 자식 둘을 키우고 방 두 칸짜리 집을 장만했다. 아버지는 그러는 동안 정년 퇴직 하시기 전까지 외국 여행은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으셨다. 다니던 직장도 때려 치우고 세상 좋게 여행이나 다니는 주제에 의식주 문제가 해결 되기를 기대하다니. 지금도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피땀 흘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돌팔매를 맞을 생각이다. 모르겠다. 뭐가 맞는 건지. 다만, 궁금한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최선이고, 모두가 다 그렇게 사는 것이고, 더 행복하기 보다는 그저 덜 불행하기를 바라는 것이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정답일까. 


수영장 카페 테라스에 앉아서 400원짜리 빵에 숙소에서 챙겨 온 버터를 발라서 미지근한 물과 함께 맛있게 먹는다. 이 글을 쓰고 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경멸을 받게 될까. 그래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 뻔뻔스럽게 바랄 것이다. 저녁 식사는 온 가족이 같이 했으면 좋겠고,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쉬었으면 좋겠고, 일 년에 한 두번은 가족 여행을 갔으면 좋겠고, 내 월급으로 감당할 수 있는 집이 있어서 비바람 안 맞았으면 좋겠고, 아프면 병원을 갈 수 있었으면 좋겠고, 내가 늙어 노동 능력을 상실했을 때에도 비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도 버스와 지하철을 계속 환승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Congratulation London!